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전통사찰 146] 대한불교 조계종 황금사찰 '수국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5-26 00:13:34
  • 수정 2024-05-26 00:15:58

기사수정

수국사 대웅보전 측면

[박광준 기자] 수국사는 1459년 세조의 큰 아들 숭(덕종으로 추존)의 왕생을 위해 고양군 동쪽 봉현에 능참사찰로 창건을 명한 정인사의 후신이다. 하지만 재목이 부실하다 하여 1471년에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한씨가 판내시부 이효지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여 총 119칸의 규모로 중창하는데, 당시 사격이 봉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정면




1721년에는 서오능에 소재하는 숙종과 인현왕후가 안장된 명릉의 능침사찰로 지정되면서 이름도 수국사로 바뀌었다. 순종이 태자 시절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승병의 최고책임자인 충섭 월초스님의기도로 쾌차되어 이를 계기로 고종의 후원을 얻어 1900년 수국사를 중창했다. 


대웅보전 내부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보현보살

약사여래

관세음보살그 뒤 6.25 전란으로 옛 모습은 잃었지만,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해 중창을 거듭하여 중창을 거듭해 오다 1995년 황금법당을 지었다. 황금보전 법당은 외9포, 내15포, 108명 규모에 청기와로 된 전통목조법당이며 법당 안팎을 기와 이외에는 100% 순금으로 개금불사했다. 


현재 수국사에는 보물 제1580호인 고려 후기의 불상 목조아미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36종 84점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6점 (아미타후불화, 십육나한도, 극락구품도, 감로도, 현왕도)이 남아있다.   






수국사의 중창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염화미소전 전경 염화미소전 내부






성종2년(1471년) 덕종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했다고 한다. 같은 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해 10월에 낙성했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했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운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장전

지장전

개금법당 




또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했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됐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돼있는 아미타좌상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해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했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했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했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하면서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소원을 물으니 스님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면 스님에게 벼슬과 녹봉을 내리면 어떻냐?”로 물으니 이에 스님은 “출가한 자가 국가의 녹을 받으면 외람된다”고 사양하고 다만 서오릉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애석하니 원컨대 근교에다 정사(精舍)를 내리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다며 수국사의 중창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은 “효심과 신심은 본래하나(孝心信心元無二)”라 하고 어명을 내려 수국사를 중창하게 했다고 한다./사진-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