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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전시9] 선사.고대관/벡제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6-05 19:10:42
  • 수정 2024-06-16 21: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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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백제(百濟)는 기원 전후,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온 이주민들이 토착 세력과 결합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한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점차 마한의 여러 소국을 통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했다. 그 후 웅진 (지금의 공주),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 독창적인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한성 시기에는 국가 조직을 정비하고 왕권 중심의 고대 국가 토대를 깆춰 나갔다. 


서울 석촌동 고분이를 바탕으로 3세기에는 마한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가 됐고, 4세기에는 영토도 넓어지고 국제적 지위도 올라갔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국력이 약해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무령왕 때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일본과의 외교에 힘써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백제 문화가 가장 크게 번성한 때는 사비 시기였다. 생산 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성과 사찰, 능묘를 중심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가 발달했다. 백제는 중국 남북조 국가를 비롯해 신라, 가야, 왜 등 주변 국가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고대 동아시아 문물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다.


풍남토성에서 발굴한 벼루와 돌추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외부 세력의 침략을 막아 내고 영역을 넓혀 가면서 점차 고대 국가로 성장했다. 3세기 때에는 법을 만들고 행정조직을 정비해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4세기 중엽 백제는 한강 유역을 넘어서 마한 전역을 통합하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에는 왕권과 귀족 세력 사이의 균형을 잡고 제도를 정비해 국가를 재건했다. 성왕은 웅진 도성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지방 통치 체계를 강화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펼친 백제는 크게 번영했다. 


# 왕권 강화


고리자루 큰칼(4-5세기)/전북 완주 상운리, 충남 천안 화성리, 충남 서천 봉선리, 충남 서천 봉선리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였던 백제는 3세기 이후 중앙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관료제도를 마련해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통치 체제를 갖춰갔다. 법령을 정비하고 도성을 비롯한 성곽을 축조해 가는 과정은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백제의 도성이나 왕궁은 서울 풍남토성과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다. 백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주변으로 영향력을 키워 갔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제 무기는 백제의 강력한 군사력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 지방 운영


나주 복암리 3호 무덤/ 이 무덤은 하나의 봉분에서 독널무덤과 돌방무덤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확인되어,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의 무덤 변화를 잘 보여준다. 특히 독널무덤에서 사비식 석실무덤 으로 버뀌어 가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갔음을 나타낸다.  삼국의 대치 속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국가의 생산과 발전에 중요한 문제였다. 백제는 왕권 중심의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다. 한성 시기에는 통합된 지역의 세력가에게 금동 관이나 신발, 중국제 자기와 같은 귀한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과시했다. 사비 시기 여러 지역에서 은으로 만든 관장식이 확인되는데, 이는 중앙의 지방 지배가 확대되었을 보여 준다. 


검은간토기/그릇의 표면에 검은색 광택이 나게 만든 토기로, 한성 시기 백재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일상생활에 사용한 토기가 아닌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 추정된다. 

신발,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한편, 4세기 후반 백제가 통합한 영산강 유역에서는 죽은 사람을 항아리에 넣어 묻는 옹관 문화가 이어지다가, 6세기 중엽 이후 돌로 방을 만들고 흙을 쌓아 묻는 사비식 돌방문덤으로 바뀌었다. 


# 세련된 문화를 꽃피우다,


'대통' 도장을 찍은 암키와, 대통은 중국 양나라 무제(재위 502-549)가 527년부터 529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백재의 사비 천도가 538년인데, 그보다 빠른 시기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은 부소산성이 천도 이전부터 축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소상' 글자를 새긴 글자를 새긴 토기, 6세기,충남 부여 관복리/ 관복리 유적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가이다. 수키와를 활용한 토관에 연결헤 흘러온 물이 안에 고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위쪽에는 뚜껑을 덮거나 연결할 수 았도록 턱이 있으나, 출토 당시에는 거꾸로 바닥애 묻어둔 상태였다. '소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작은 구멍이 위쪽'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백제 문화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수막새백제 문화는 석촌동 고분군에서 보이듯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중국 남조와 교류하면서 부드럽고 세련된 독자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백제 사람들은 고유의 전통 위에서 개방적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나갔다. 


금관이렇게 독자적인 문화를 만드는데는 특히 불교와 도교 등 종교의 역할이 컸다.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사비 시기에 많은 사찰을 세웠고 정교한 불교 공예품들을 만들었다. 백제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다양한 공예품들은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며 세련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 종교와 사상


연꽃 짐승얼굴무늬 벽돌

용무늬 벽돌

'숙세'가 쓰인 목간, 6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목간으로, '숙세결업동생일처  시비상문상배백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생의 업에 의해 인연을 맺게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고대 국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다. 건국 초기에는 시조가 되는 조상신과 하늘에 있는 천신, 땅에 있는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점차 유교와 불교를 받아 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보살부처 불교는 사비로 도음을 옮긴 이후 크게 유행했다. 국가 주도로 많은 사찰과 의신용구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도교는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뒤족 사회에서 환영받았다.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등에서 도교가 성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 다양한 경제생활을 하다


백제는 우수한 철시 생산 기술로 다양한 농기구를 만들었고, 발달된 토목 기술로 대규모 저수지와 농지를 확보했다.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증대됐고, 이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바탕이 되었다. 철기나 토기, 유리 등을 생산하는 작업장인 공방에서는 전문 기술자인 장인이나 다양한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다. 


그릇 받침/그릇받침은 실생활보다는 의례 행위 때 사용된 것으로, 공양물을 담은 둥근 바닥의 항아리를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성 시기부터 사비시기까지 백제 문화권 주요 유적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제사용 그릇받침이 확인된다.   공방에서 생산된 제품은 유통망을 따라 중앙과 지방 각지로 공급됐다. 사비 시기에는 관영 수공업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는데, 그곳에 소속된 장인 중에서 뛰어난 사람은 박사(博士)라는 호칭을 받기도 했다. 특히 건축이나 기와 제작 솜씨가 뛰어난 백제 장인은 신라와 왜에 파견돼 숙련된 기술을 전했다. 


# 생산 경제의 발달



백제의 자인은 금.은.구리.철 등의 금속 제품을 비롯해 유리.토기 .기와 등 다양한 제품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각종 귀금속과 철기를 생산하는 공방은 특정한 장소에서 집단으로 운영됐다. 부여 관북리 유적이나 쌍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 등과 미륵사지에서도 공방 터가 확인된다. 백제의 공방터에서는 도가니, 거푸집과 같은 제작 도구와 생산 재료가 함께 발견된다. 


# 여러 나라와 문화를 교류하다


청자 호자, 3-4세기/호자는 중국 유조시대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한반도 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효자 역시 서진 (265-316년) 말에서 동진(317-419년)초기에 제작되어 수입된 것이다. 개성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호자는 주구에 호랑이 얼굴이 표현되고, 몸체에 4개의 발과 함께 손잡이가 부착되어 아동에 용이하다. 백제 귀족층이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면서 국제적 입지를 다졌다.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여러 왕조의 다양한 문물을 수입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문화 수준을 높이면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동진을 비롯한 남조로부터 도자기와 함께 벽돌무덤과 같은 양식도 받아들였다. 



청동 자루솔, 4-5세기, 서울 풍남토성/자루솔은 중국에서 유행한 의기의 일종이다. 손잡이가 길고세 개의 다리가 달린 솔의 형태로, 주로 술이나 약 등을 끓이거나 세우는데 사용했다. 풍납토성 출토품도 중국과의 교류관계에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자루솔은 왕이나 귀족, 수장과 관련된 루적으로 출토됐다. 

#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진출처/국가유산청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사진출처/국가유산청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백제는 이웃한 신라와 가야, 왜와도 서로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동아시아  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왜에 불교를 전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일본 고대 아스카 문화가 성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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