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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49]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 '호압사2(서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08 08: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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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조선 개국과 함께 한양에 궁궐이 건립될 때 풍수적으로 가장 위협이 된 것은 관악산의 불(火) 기운과 삼성산(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이었다. 그래서 왕조에서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숭례문(남대문)에는 편액의 숭(崇)자 위의 뫼산(山)자를 불꽃이 타오르는 불화(火)의 형상으로 표현을 했다. 또한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창건하게 했는데 이것이 호압사이다. 


이렇게 궁궐(경복궁)을 위협하는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됐다는 호압사는 18세기 전국 사찰의 소재와 현황, 유래 등을 기록한 '가람고'나 '범우고'에도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裨補)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호압사가 불교 수행의 도량(道場)이면서도 풍수적으로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상징성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역사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면서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했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했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면서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했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고,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두 전설에서 호압사의 창건 시기는 태조 때로 나타나지만 '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에는 1407년(태종 7) 왕명으로 절을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 '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됐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이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1921년에는 당시 주지였던 안만월(安滿月) 스님이 약사전 6칸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퇴락한 사찰은 1994년 7월 주지로 부임한 원욱(元旭) 스님에 의해 중창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그간 망실됐던 사찰 소유의 토지를 되찾고, 1995년 약사전을 증축하고, 삼성각을 신축했다. 또한 1996년에는 전기가 들어오게 했고, 2000년에는 일주문을 건립했다. 이렇듯 1994년 이후 10여년에 걸친 원욱 스님의 중창불사로 인해 호압사는 면모를 일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호암산(虎巖山)은 관악산(629m)에서 이어진 삼성산(481m)의 지맥 금주산(390m)은 금천구 의 진산으로서 관익산 전체의 서쪽에 위치하고 산세가 북쪽 (한양)을 바라보는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일명 호암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산에는 호임신성과 한우물, 석구상, 호압사 등 많은 사적과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호암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2년(672년)경 나당전쟁때 한강과 서해남양만에서 오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 하기 위해 산 정상부근 능선을 따라 1,260m를 축성한 요새로 추정하고 있고 지금은 300m 정도만 남아 있다. 






한우물은 산성내부에 2개소가 발굴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 호암산성과 같이 축조된 것만 복원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뭄이 극심할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았고, 전란 때는 군용수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호암산성과 함께 1991년 2월 26일 서적 제34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석구상은 한우물에서 북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돌로 조각된 한 마리의 개 모양으로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조선왕조 도읍설화에 의하면 경복궁 광화문 앞 해태상과 마주보게 하여 장안의 화재를 예발ㅇ할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디 



호압사는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태조 5년(1396)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경내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된 석약사불좌와 창건 당시 식수된 것으로 보이는 수령 600년생 느티나무 2그루가 서울시 지정보호수로 관리 되고 있다. 


기타 호암산에는 시흥계곡, 칼바위, 그리고 송진냄새가 그윽한 오솔길과 옹달샘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어 휴식공간 및 등산로로 그 명성을 더하고 있다. 호암산성 관련기사는 별도로 취재하여 게재할 예정입니다. /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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