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 기자] 석조전은 덕수궁의 상징이자,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구상되어 1910년 준공됐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얼마 안 되어 당시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브라운이 고종에게 석조전 건립안을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이에 고종은 브라운이 소개한 영국인 건축가 하딩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그는 1898년에 설계도를 완성했다.
정면 54m, 너비 31m의 3층 석조건물인 석조전은 그리스 신전처럼 정면에 열주가 강하게 드러나고 좌우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8세기에 영국 식민지 여러 곳에 총독 관저로 세워진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이다.
편전과 침전이 따로 있는 전통 궁궐과는 달리 황제의 침실과 집무실,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응접실이 한 건물에 있는 서양식 궁전으로, 지층은 시종들의 대기 공간, 1층은 황제의 접견실, 2층은 황제의 침실과 응접실 등으로 구성됐다.
1900년 기공식을 갖고 터 닦기를 시작해 1903년부터 벽체와 골조를 올리는 공사를 1906년까지 계속했다. 외형상으로는 석조건물이지만 안쪽은 벽돌을 쌓은 조적조(組積造)fh, 외벽을 돌로 마감했다. 이 공사는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과 설계자 하딩, 일본인 기술자 등이 공사 감독으로 참여했다.
1907년부터는 실내장식에 들어갔다. 이 인테리어 공사는 석조전에 사용할 가구를 납품한 영국의 메이풀사가 맡아 1910년 석조전이 준공됐으나 고종은 태상황으로 물러났고 같은 해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당하면서 당초의 목적대로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다.
석조전은 완공 후 간혹 이왕직의 연회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사실은 빈집이었고 일본으로 강제 유학한 영친왕이 일시 귀국하면 임시 숙소로 이용했다. 1922년 이후 덕수궁이 방치되면서 석조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다가,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에 따라 일본인들의 소장품 중 영친왕이 선별한 것들을 전시하는 덕수궁미술관이 됐다.
이에 반발하자 일제는 1938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서관을 짓고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을 옮겨왔다. 이렇게 설립된 이왕가미술관은 서관은 창덕궁에서 옮겨온 조선미술품, 동관에는 일본 근대미술품을 전시했다.
석조전 앞 정원은 하딩의 설계 당시에는 바로크식 정원이었으나 외국 수종(樹種)들이 오래가지 못해 이내 망가졌고, 1938년 서관 준공 때 분수대가 설치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석조전은 해방 후 한때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된 뒤 한국전쟁으로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해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했다.
서관은 현재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본관은 궁중유물전시관이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발전해 경복궁으로 이전하면서 2009년부터 5년간 내부를 원형대로 복원해 2014년 대한제국 포고일인 1월 13일 준공해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일반에게 공개됐다./사진-이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