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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꿈, 대한민국의 미래 4] 근대 최초 시례로 본 인천시 중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6-16 06: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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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1882년)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 영국 군함 플리잉피쉬(Flying Fish)호가 제물포에 입항했을 때 수병들이 잠시 상륙해 자기들끼리 축구 시합을 벌인 것이 최초의 축구 경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우리나라에 근대 축구가 정식 보급된 1904년 보다 앞선 1901년에 강화도에 근대 축구팀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한편 한국 야구의 기원은 1904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질레트(Philip. L. Gilet)가 야구 장비를 들여와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 회원들에게 타구 또는 격구라는 이름으로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인천영어야학회에 재학했던 학생의 1899년 2월 3일자 일기 내용을 통해 이미 당시에 인천에 야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서양과 맺은 최초 조약 채결(1882년)



1882년 4월 6일(양력 5웕 22일)제물포에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다. 조약 체결의 장소는 당시 해관 관리관의 사택 부지였던 현 자유공원 청일조계지경계계단 위쪽이었고, 그 지점에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후 영국, 독일 등 구미 열강들과의 조약체결에 근거가 되었다. 더구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태극기가 처음 인천에서 계양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해관(1883년)


초기 해관해관은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사무등을 맡아보는 행정기관으로 오늘날의 세관과 같다. 인천해관은 1883년 6월 16일 창설돼 업무를 시작했는데,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원산해관이, 11월 3일에는 부산해관이 각각 업무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은 1878년 9월 29일 부산항에 창설된 두모진해관이지만, 생긴지 3개월이 지나지 않아 1878년 12월 26일에 폐관됨에 그 후 제일 먼저 세워진 인천해관이 사실상 우리나라 근대적 세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 청관의 기원과 짜장면(1884년)


짜장면벅물관(구 공화춘)인천 개항과 함께 1884년 형성된 청국조계지에는 관원, 상인, 노동자들로 넘쳤다. 당시 이들을 상대로 할 숙박업과 요식업이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면서 특히, 중국인 쿨리들과 부두노동자들의 간편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짜장면이었다. 짜장면을 정통 중국요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화교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했던 인천 청관에서 시작된 짜장면이 이제는 남녀노소 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 내리교회(1885년)


내리교회

인천에서 개신교회의 시작은 1885년 4월 부활주일에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부부가 인천에 상륙하면서였다. 1891년 6월 아펜젤러가 제물포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37.5M2 규모의 교회를 세웠는데, 방 두 개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내부는 단순하게 꾸며 설교단만 있었던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었다. 얼마 후에는 여신도를 위한 별도의 예배당도 마련했다. 그리고 이후 1901년 12월 벽돌로 이루어진 십자형의 세 건물을 신축하였고 1958년 12월에는 연면적 1,067.8M2 규모의 새로운 건축물을 세웠다.  


# 서구식 대불호텔(1888년)


대불호텔(중화루)대불호텔은 일본식조계지 내에 1884년 일본식 여관으로 건립되었다가 이후 1888년 확장해서 벽돌식 3층 건물로 신축되었고, 일본인 사업가 호리 집안에 의해 운영되었다. 1888년 신축된 대불호텔은 서울의 손탁 호텔(1902)보다 앞서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벽돌 3층의 양식 건물로 1887년 확장 신축해 1888년에 낙성시킨 것인데, 처음부터 외국인 상대의 서양식 호텔로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의 숙박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18년 중화루라는 중국 요리점으로 이용되다 1978년에 철거되었고 현재는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근대현대사의 현장, 각국공원(1888년)


각국공원(현 자유공원)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으로, 1897년 설립한 서울의 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앞선다. 공원의 설계는 러시아 토목기사인 사비찐이 담당했고 각국공동조계 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 광복 후에는 만국공원이었다가 1957년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 이후 자유공원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전개하면서 한성임시정부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를 만국공원에서 개최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 신식 화폐를 만든 인천 전환국(1892년)


개국 501년명 닷냥 은화1883년 서울에 경성전환국이 세워졌으나 제조기술의 부족과 화폐제조에 필요한 재료조달이 어려워 인천으로 전환국을 이전했다. 인천 전환국은 1892년 5월 착공되어 11월 준공되면서 근대 화폐제조가 시작되었고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등화, 1푼 황동화 등을 주조했다. 이후 경인철도 완공으로 화물운송이 편리해짐에 따라 1900년에 다시 용산전환국으로 이전했다. 


# 경인철도((1899년)


인천역과 기차경인선은 1897년 3월 22일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개통돤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이후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7월 8일 노량진-서울 사이가 개통되어 12월 12일 서대문에서 개통식을 거행했다. 경인철도 개통 이전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은 우마차 등으로 12시간이 걸리던 육로교통과 인천-용산간의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다. 개통 당시의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영되었고 인천역-축현역-우각동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개 역에 119명의 직원이 종사했다. 33.2km 구간을 1시간 30분에 달렸으며 오전, 오후 하루 2차례씩왕복했다. 


#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발 하와이 이민(1902년)


최초 이민선 갤릭호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인천 제물포역에서는 하와이로 떠나는 근대 이민이 시작되었다. 당시 첫 하와이 이민자의 출신지역은 제물포, 부평, 강화와 교통 등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지역이 86명으로 전체 102명 중 84%에 달했다. 1903년 1월 13일 새벽 호놀룰루행에 입항했는데 떠날 때와 달리 86명만이 최종적으로 남아 오아후섬 와이알루아 농장에 짐을 풀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해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하와이로 간 이민자수는 7,226명에 달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월미도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설립되었다. 


# 팔미도등대(1903년)


팔미도등대1903년 6월 1일 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졌다. 팔미도등대는 해발 71m 섬 꼭대기에 세워진 높이 7.9m,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의 구조물로 건축 재료는 바닷물에 부식되지 않는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면서 정식으로 등대원을 파견하였고, 1954년 9월부터 자가 발전시설을 갖추고 백열등으로 불을 밝혔다. 1992년에는 태양광발전장치를 설치하여 보다 나은 시설을 갖추었다. 팔미도등대는 인천상륙작전시에 불을 밝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00년의 풍파를 견뎌낸 팔미도등대는 2003년 12월 새로 지은 신축 등대(천년의 빛)에게 임무를 맡기고 영구 보존되고 있다.


# 근대적 기상관측의 시작 인천기상대(1904년)


관측소 전경근대적인 기기와 장비를 통해 기상관측을 시작한 것은 1904년으로, 특히 러일전쟁으로 인해 기상정보가 필요했던 일본은 1904년 4월 6일 제물포에 기상관측소를 두었다. 1905년 에는 각국공원이 위치한 응봉산 정상에 청사를 신축,이전했다. 광복 후 인천기상대는 중앙기상대, 인천 측후소 등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현재 대전지방기상청 인천기상대로 자리하고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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