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연극 '사라지다'가 돌아왔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02 18:11:59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사라지다'가 돌아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던 감염병과 그로 인한 거리두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거리의 불빛과, 사람들의 수다와, 성탄의 캐럴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바로 이 시기, 12월 맞춤형 작품으로 극단 고래의 열여덟 번째 정기공연 '사라지다'가 우리를 찾아왔다. 

 

거리가 눈에 익다. 눈이 쏟아질듯 잔뜩 찌푸린 하늘.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가로등불이 하

나둘씩 초라하게 켜지고 있다. 한 해의 끝. 아련함과 설렘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지럽

다. 시작과 끝을 왜 정해 두었을까. 시간의 흔적인가. 기억하기 위해서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면 기억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여행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인가. 작품 속에 부재하는 듯 가장 강력하게 존재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윤주의 독백을 시작으로 관객들은 수다를 떨어대는 여자 네 명과 그들이 이모라 부르는 트랜스젠더 한 명이 앉아있는 한 아파트의 거실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상강, 청명, 동지, 신정, 그리고... 말복. 작가 이해성은 왜 인물들의 이름에 절기를 부여했을까? 그곳에 바로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이 인물들은 각자 한 해의 계절적 흐름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자 어느 한 명 빠지면 '사라지다'라는 작품의 우주가 완성체로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암시가 들어있기도 하다. 


그만큼 이 다섯 명의 인물 하나하나는 개성 있고 매력적이다. 마치 MBTI 검사처럼 ‘나는 어느 누구에 가까운 인물일까...’ 라는 관점으로 이 극을 관람하는 것도 재미있을 터이다. 코로나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심리치료법, 친구들과의 수다 청명 응, 우리 다섯 명, 고등학교 때 여기 놀러오면 이모가 고구마 자주 삶아 줬잖아. 

 

그때 생각나서 아까 시장 볼 때 많이 샀어. 상강 그래 맞다. 우리 다섯 명, 그때는 여기가 우리 아지트였다. 

 

매일같이 몰려와서 밤새 떠들고 웃고 울고 야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청명 무슨 20년이야? 십, 팔년 정도 됐구만. 상강 이런 십팔 년 같으니. 그땐 정말 피부도 뽀얗고 팽팽했었는데. 청명 피부가 그냥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해가지고 살에서는 단내가 났었잖아. 

 

순진하기는 또 얼마나 순진했니? 맞어! 상강이 너 그거 기억나니?

상강 뭐?

청명 중학교 2학년 땐가 우리 다섯 명, 신정이 집에 모여서, 야동 본거. 상강 기억나지. 그때 네가 징그럽다고 토하고 울고 그랬잖아. 


'사라지다'는 남성 작가가 쓴 여성들의 이야기다. 언제 그렇게 여성들의 수다를 훔쳐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작가 이해성이 보여주는 여성의 세계는 생생하고 재미지다. 중학교때부터 함께 자라고 살아온 여자친구들끼리 서로 듣기 좋은 말만 주고받는다면 현실감이 퍽이나 떨어질 것이다. 말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내용도 어느 새 불어버리고, 허구헌 날 아픈 사랑이나 해쌓고, 직장에서 상사에게 당하다 못해 막말 전화까지 하는 친구들이지만, 그래서 때로 비난도 하고 육탄전까지 해대며 거실 바닥을 뒹굴어도 네 명의 여자동창생들은 결국 가장 잘 서로를 보듬어 안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돌봄 노동의 중요성은 더욱 부상했다. 집 밖이 위험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서 옹기종기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삼식이’ 대열에 편입됐고 이들을 책임지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그런 여성들에게 여성 간의 수다, 여성 간의 연대가 없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사라지다'는 여성들이 함께 있을 때 어디까지 자기 마음을 열어보일 수 있는지, 또 그 이야기들을 통해 얼마나 치유받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 전반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경계’다. 여자와 남자의 경계,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아닌 사람들과의 경계, 장애인과 장애인 아닌 이들과의 경계...우리는 그간 감염자와 감염이 (아직) 안 된 이들과의 경계에 얼마나 과도한 무게를 실어왔던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극 중 인물 동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상이 '불안한 결합'인 것만큼 사실 그 경계는 언제

든 바스라져 버릴 수 있는, 이미 조금씩 균열이 나기 시작한 선이건만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하고 굳건한 담장인 냥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경계를 세우고, 또 지키려고 애를 쓴다. 


'사라지다'는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라져야 마땅한 것은 편견과 경계라고. 동지 어디까지가 욕망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랑일까? 헤어진 남자친구랑 하는 섹스는 

사랑일까 욕망일까? 사랑에 빠졌을 때 분명히 욕망을 뛰어넘는 순간이 있긴 한 것 같은데 

말이지. 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느낌! 아냐 재미없어. 불안함. 아슬아슬하고 금이 가 있는 

듯한 불안. 그래 세상은 불안한 결합이야. 욕망과 사랑도 그렇고, 남자와 여자도 그렇고, 몸과 마음도 그렇고, 삶과 죽음도 그렇고. 트렌스젠더 말복의 쓸쓸한 내면이 조합에 또 한 사람의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성전환수술을 한 트랜스젠더 말복. 아버지에서 이모로 삶의 자리를 이동한 말복은 세상을 떠난 윤주의 이모이자 이들 네 사람의 이모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고 절실한 위로가 필요한 맡았다. 


그는 이해성 연출로부터 트랜스젠더 배역 제안을 받았을 때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면서, “배우가 트랜스젠더 역할을 해 보는 경험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이 역할에 대한 의욕을 내보였다. '사라지다'는 배우 신현종을 재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