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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331]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 박광준 기자 2024-05-17 22:26:46

[박광준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전시 중인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상(옛 지정번호 국보 제81호)과 아미타불상(옛 지정번호 국보 제82호)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통일신라 8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미륵보살상에는 381자의 명문이, 아미타불상에는 392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불상의 제작 연대와 조성자, 조성 배경을 알려준다. 명문의 일부 내용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㙮像) 제4 남월산(南月山) 조(條)에도 인용되어 있어 두 상은 조성 당시부터 중요한 불상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울산광역시로 가는 길 주변의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석불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이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황금 소불상이라면, 이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형제 석제 거불로 불린다.



이 부처상이 만들어진 감산사는 김지성(金志誠)이란 사람이 자신이 소유했던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해 세운 절로, 이러한 사실은 이 두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새겨진 명문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편 남월산(南月山)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불상 뒷면에는 불상의 제작을 의뢰한 발원자 및 조성 경위, 조성 배경 등에 관해 자세하게 적혀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인 성덕왕 18년(719년)에 왕의 기밀 사무를 취급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집사성(執事省)의 시랑(지금의 부총리 격)을 지내던 김지성(金志成)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미륵상 1구와 아미타상 1구를 만들었다. 



특히 이 미륵보살은 어머니를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김지성은 평소 자연을 좋아해 노장자(老莊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했고 불교도 중히 여겼다고 한다. 이에 67세가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불교 이론을 깊이 연구했고, 이후 다시 복직되어 관에 들어갔으나 마음만은 불교를 떠나지 못해 모든 재산을 희사해 감산사를 세웠다고 한다. 감산사를 짓는 공덕은 국왕 이하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을 제도케 하여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붓다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부분에는 불교의 시원이 서역에서 시작돼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신라에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의 신라 땅이 마치 사위성과 같고 극락과 비슷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을 만든 것은 국주대왕(國主大王), 이찬 개원공(愷元公), 돌아가신 부모님, 돌아가신 동생이자 소사(小舍)였던 양성(梁誠, 김양성), 사문 현도(玄度), 돌아가신 아내 고로리(古路里), 돌아가신 누이동생 고보리(古寶里)와 함께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작은 발원의 인연으로 인해 모두 피안(彼岸)에 오르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했는데, 문장은 내마(奈麻)인 총(聰)이 짓고, 사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 김취원(金驟源)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아버지 인장일길간이 향년 37세에 돌아가시자 동해에 뼈를 뿌렸다는 내용과 성덕왕 19년(720) 4월 22일에 김지전이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 두 불상은 719년에 만들어진 이후 계속 경주 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현재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이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두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 높이가 2.52m로, 상당히 이국적인 풍모를 지녔다. 살짝 비튼 몸, 화려한 장엄, 길게 드리워진 영락 장식, 몸에 밀착된 군의(치마) 등은 처음 보는 표현들이다. 특히 군의는 인도의 도티(dhoti)를 연상하게 한다.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는 도솔천 미륵보살의 보관에 화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불상 또한 명문에 새겨진 것처럼 이 상이 미륵보살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보관의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신라에서 처음 도입되어 유행했던 보살상 양식으로,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 주는 예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삼존불의 양쪽 협시상(脇侍像)이나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의 서쪽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살상들은 조성 연대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원형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이 두 석조불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신라 금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불상을 제작한 확실한 기년명을 알 수 있어 신라시대 불교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3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훼손된 부분이 거의 없고,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신라시대 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로, 그 가치가 높다. 형제 불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됐다.


광배의 명문에 따르면 성덕왕(聖德王) 18년(719) 2월 15일(부처의 열반일), 신라의 관료였던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이 고인이 된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一吉湌)과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를 세우고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김지성은 여러 관직을 거쳐 집사부(執事部)의 시랑(侍郞)에 올랐던 6두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성덕왕 4년(705) 견당사(遣唐史)로 당(唐)에 다녀왔고, 명문에 나타난 상사(尙舍)라는 직함은 당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7세(718)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전원으로 돌아가 한편으로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유유자적함을 흠모하기도 하였으나, 불교 논서인 무착(無著)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읽는 등 법문을 깊이 연구했다. 719년 자신의 재산을 바쳐 정성을 다해 감산사를 조성했고, 다음 해인 720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륵보살상의 명문 끝에는 동해 흔지(欣支) 바닷가에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의 유골을 뿌렸다고 되어 있고, 아미타불상의 명문에는 47세에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골을 같은 장소에 뿌렸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김지성이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 인장 일길찬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했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발원문에는 위로는 국왕의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고, 개원(愷元) 이찬(伊湌), 김지성 자신의 형제자매, 전처와 후처, 서형(庶兄) 등을 포함해 법계의 일체 중생이 함께 세속을 벗어나 모두 부처의 경지에 오르기를 기원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에도 공통적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한국 고대 불교조각사에서 이 두 상이 손꼽히는 이유는 8세기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성립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고식의 흔적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듯, 불보살상의 두 눈이 두툼하고 얼굴도 넓적하고, 커다란 상의 규모나 무게감에도 전반적으로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예불의 대상으로서 불상 정면의 모습을 강조한 석공의 의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신체의 입체감과 팽만한 부피감을 강조한 8세기 중반 석굴암의 역동적인 인체 표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유리벽에 막힌 듯 더 이상 뻗지 못한 채 신체에 밀착된 손과 팔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상을 조각하던 석공은 분명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조각 양식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변화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투영했다. 그 결과는 섬세하면서도 경건하고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감산사 불상만의 특징으로 승화되었다./사진-박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