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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흐르는 청양 '지천 백리길' 윤여금 기자 2024-05-26 08:49:07

 

[윤여금 기자] 지천 백리길은 대치면 상갑리부터 청남면 인양리까지 이어져 있다. 칠갑산에서 대덕봉에서 발원한 지천은 성태산과 월산에서 발원한 구룡천과 힘을 합해 일백이십리를 흐르는 청양의 대표하천이다. 


굽이굽이 흐른다 하여 지천(之川)이란 이름 외에도 어을항천, 까치내, 금강천, 등 마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져왔다. 천년고찰 칠갑산 장곡사와 정혜산 정혜사에서 발원한 물들은 본류에서 금강사지를 끼고 백제시대 최고 의결기구인 정사암(천정대)를 휘돌아 금강과 합류하면 백마강이 된다. 


                         ▲지천 백리길


지천 인근에는 20여종의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을 포함 해 120여종의 조류, 60여종이 넘는 어류가 서식하며 철따라 피고 지는 300여종의 식물들이 자생한다. 


또한 세계 유일의 물고기 미호종개의 법적보호서식지(천연기념물 533호)인 지천은 우리나라의 보배로운 하천이며 우리 모두가 아끼고 지켜 나가야 할 청양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


청양의 아름다운 125리(약56km)의 지천을 축소하여 조성한 계류(길이 150m)이다. 사람들은 계류를 따라 이동하면서 느끼고 관찰해 본다.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의 연못


       ▲지천 생태공원 계류의 연못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의 연못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계류


      ▲지천 생태공원 


                       ▲지천 생태공원 


       ▲지천 생태공원 내 말무덤이 높이 2.5m, 너비 12m, 둘레 37.7m이다.


교월리 말무덤은 청양향교 근처의 현재 지천생태공원에 위치해 보존되고 있다. 대대로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말덤은 수백년 이상 ‘말묘’, ‘말무덤’이라고 불리며 보존해 왔다고 한다. 말무덤은 단순히 말(馬)을 묻은 무덤일 수도 있지만 이 말무덤의 ‘말’ 어원은 ‘크다’, ‘많다’는 뜻으로 불러 왔고, 현재 거대한 규모로 볼 때 범상치 않은 유적이다.


예부터 이 말무덤 주변은 곡식을 심고 밭도 일구었지만 이 무덤만은 손대지 않았고 항상 신성시 여겼다고 한다. 일부 의견에서는 가야고분의 발굴 당시와 비슷한 형태와 토질 등을 갖추고 있어 이 무덤이 천년을 넘어서는 고대의 고분으로까지 추정된다고 한다. 이렇게 교월리 곳곳의 말무덤들은 청양의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자 조상의 숨결이 담긴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 이자송 (李子松) 선생의 말무덤은 인근 교월2리 평촌에 있다. 이자송 선생은 요동정벌 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고려 최고의 명장인 최영장군에게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또 이자송 선생의 시신까지 없애버렸고 현재 교월2리에 있는 무덤에는 이자송 선생의 애마가 천리를 달려 입에 물고 온 의대만이 묻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자송 (李子松)은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순위부상만호, 수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다. 본관은 청양(靑陽)이다. 1358년(공민 7) 10월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로 양광전라도찰리사(楊廣全羅道察理使)가 되었고, 1362년 6월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건적을 평정한 사실을 알렸다. 또 그들에게서 획득한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금은동인(金銀銅印) 20여 개, 금은패 등을 바쳤다.

 

이 때 원나라에서 반공민왕파 최유(崔濡) 등의 선동으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후 이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홍순(洪淳)·황대두(黃大豆) 등과 함께 이를 거부하였다. 그 공으로 1364년 8월 귀국한 뒤 미두(米豆) 30석을 받고, 10월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또한 단성보조공신(端誠輔祚功臣)에 봉해졌다. 다음해 2월 요양(遼陽)에 가서 원나라의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흑려(黑驢)에게 백금과 안장을 주었다.

 

같은 해 4월 공천군(公川君)에 봉해졌다가 7월 평양윤(平壤尹)이 되고, 1372년 6월 동북면존무사(東北面存撫使)로 나갔으나 동계(東界) 안변(安邊)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해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1375년(우왕 1) 4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서북면도순무사 겸 평양윤이 되었고, 1377년 3월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사은사가 되어 북원(北元)에 가서 책명(冊命)을 내린 것을 사례하였다. 그 뒤 순위부상만호(巡衛府上萬戶)를 겸직했고, 1382년 6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일시 한양(漢陽)으로 천도했는데 특명으로 송도(松都)를 유수(留守)하였다. 11월 왕이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자 근신할 것을 간했다가 미움을 사 얼마 뒤 파직되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88년 3월 요동 정벌에 반대하다가 임견미(林堅味) 일당으로 몰려 장류(杖流)에 처해졌고 곧 이어 죽임을 당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