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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37]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이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덕수궁(2)'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02 07:13:41
  • 수정 2024-04-15 17: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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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이승준 기자] ‘조선왕조실록’ 세종 1년(1419) 8월 23일자와 9월 8일자에 의하면, 이 사리전에 봉안한 사리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가져와 양산 통도사에 봉안한 사리였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세종 때 내시를 시켜 궁궐내 내불당에도 두었다고 한다. 


사리전 공사가 시작되고 몇 달 뒤인 8월 26일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세자 방식을 폐위시킨 뒤 귀양길에 죽였고 강씨 소생의 또 다른 아들(방번)과 사위(이제)도 살해했다.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됐다.


병중이던 태조는 진노했지만 친아들과 계모 사이의 갈등을 어찌하지 못하고 왕위를 내놓고 정치에서 물러났고, 이방원은 한씨 소생의 둘째 형(방과)을 왕위에 앉혔다. 이방원은 부왕을 생각해 흥천사 사리전 공사를 진행, 정종 1년(1399)에는 태조가 사리전 낙성식에 참여했다. 다음 해 태조는 여기에서 불사를 벌이고 사리를 안치했다. 


이렇게 건립된 사리전은 3층 누각 형식의 목탑이었다고 한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신덕왕후 강시의 묘 '정릉' 사리전이 낙성되고 2년이 지난 1400년, 제2차 욍자의 난으로 승리한 이방원이 마침내 왕위(태종)에 오르면서 정릉과 흥천사는 수난을 겪게 된다. 태종 3년(1403)에는 흥천사의 노비와 밭을 감하더니 재위 6년 4월에는 대대적인 조치를 내렸다.


그러다 태종 8년에 태상왕인 태조가 죽자 이듬해 2월, 태종은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해 오늘날 정릉이 있는 사을한의 산 기슭으로 천장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에 3칸짜리 북루를 새로 짓는 공사에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쓰게 했고, 또 태평루 북쪽과 서쪽에 헌을 지으면서 정릉에 있던 돌을 운반해 쓰게 하고, 정릉은 봉분까지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다만 정릉에 있던 석인상(石人像)만은 땅을 파서 묻게 했다. 


1953년경의 광통교그리고 2년이 지난 태종 10년 8월에 큰 홍수가 나서 흙다리였던 광통교가 무너지고 물을 빠져 죽은 사람이 나왔다. 이에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태종은 옛 정릉 터에 남아 있던 석물들을 돌다리 수축에 사용하게 했다. 이 광통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될 때 창경궁과 창덕궁 등으로 난간만 이전하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묻혔는데, 2003년 시작된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다시 드러나 광통교에 사용된 돌들이 실제로 정릉에 있던 석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혹 말하기를 태종이 계모인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 깊어 사람들이 석물을 밟고 다니게 했다고 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지 석물의 재활용 차원이었지 원한에 의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재 광통교에 설치된 석물

이리하여 정릉은 도성 밖으로 옮겨졌지만 흥천사는 한양도성 안의 대찰로 건재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장안 한복판에 위치하면서 나라에서 밭과 노비까지 내려준 선종사찰이었다. 그리하여 흥천사 사리전은 구조를 개조해 맨 아래층은 처마를 보태고, 벽을 조금 물려 안을 넓히고 층계.축대.난간.원장도 모두 전보다 좋게 한 뒤 항상 근무자 두 사람을 두고 각문 자물쇠를 지켜 외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했다. 


이 사리전은 낙성 이후 100년 뒤 중종 인간에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될 때까지 그 장안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사리전의 위치는 흥천사 북쪽이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세종대로 사거리 근처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 사회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점점 강화되면서 흥천사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서울 장안의 명물이던 흥천사는 창건된 지 100년이 조금 지난 연산군 10년(1504) 12월 9일 화재를 입었다. 앞서 연희동의 흥덕사도 불에 탔다. 


흥천사 전경한 차례 화재에도 흥천사 사리전은 남아 있었으나 6년 뒤인 중종 5년 3월 28일 밤에 유생들이 불을 질러 사리각도 전소됐다. 중종이 대노해 의금부에 방화범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자 유신들이 유생을 보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중종은 불교라는 이단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주에 도성 안에서 벌어진 방화 사건은 조정을 업신여긴 것이기에 용서할 수 없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중종은 흥천사를 복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불에 탄 흥천사 터의 흙을 파다가 압사한 사람이 매우 많다 하니 시신을 거두어서 장사 지내게 하고 장사할 친족이 없는 자는 해당부서가 나서서 장사하게 하라’ 명을 내리는 데 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소실된 흥천사는 선조 2년(1569) 왕명으로 정릉 골짜기 함취정(含翠亭) 터에 정릉의 원찰로 다시 지어지면서 명맥을 이어가게 됐다. 이렇게 새로 건립된 흥천사는 정조 18년(1794), 이 절 승려들의 발원을 들어 돈암동으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새로 지은 흥천사’ 라는 뜻의 신흥사(新興寺)라 바꿨다. 이후 신흥사는 다시 흥천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이 돈암동에 있는 조계사 말사인 흥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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