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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이어보기 32] 고종과 명성황후의 묘 ‘홍릉洪陵’
  • 이승준
  • 등록 2022-08-02 14:48:20
  • 수정 2022-09-19 21: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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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으로,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이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한 후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해 개혁한 형식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했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제향공간에는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우고, 안에는 당가를 설치했다. 침전 앞에는 문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태석, 낙타석, 석마의 순으로 석물을 배치했다. 


기존의 조선왕릉과 달리 향로(香路)가 가운데에 깔려 있고, 판위는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놓여져 있다. 그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예감, 어정 등이 능역 안팎으로 배치됐고 능역 옆에는 재실이 있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태황후 민씨는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을미사변)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됐다. 이후 일본의 압박으로 폐서인됐다가 다시 복위되고,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산릉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산릉공사가 중단됐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해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때 청량리 홍릉에는 기존의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설치했으나, 1900년에 홍릉의 불길론이 주장돼 현재의 남양주 금곡 홍릉에 새로운 산릉공사를 시작했으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됐다. 


그 후 고종이 19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중단됐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해, 명성태황후를 먼저 천장한 후 고종을 합장해 능을 조성했다.


고종태황제(재세 : 1852년 음력 7월 25일 ~ 1919년 양력 1월 21일, 왕재위 : 1863년 음력 12월 13일 ~ 1897년 양력 10월 11일, 황제위 : 1897년 양력 10월 12일 ~ 1907년 양력 7월 19일)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에 청니방 사저(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익황후 조씨가 양자로 삼아 익종(문조)의 대통을 계승토록 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그 후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하야하고 1873년(고종 10)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재위기간 동안에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해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친정선포 후 민씨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했고,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했고, 1897년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1907년에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친일 대신의 강요로 1907년에 강제 퇴위됐다. 그 후 1919년에 덕수궁(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돼 3.1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1896년(건양 1) 양력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태자(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태자가 러시아와 협의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처형토록 명하고, 이로 인해 을미사변과 맞물려 급진적 개혁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이 구성됐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했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의 긴 시간을 보냈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명성태황후 민씨(재세 : 1851년 음력 9월 25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에 고종의 사친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됐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했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해 피신생활을 했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해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고,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했다(을미사변).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러시아에 접근해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정했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했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고,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폐서인 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곧바로 복위됐고,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됐다./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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