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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향교 17]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12-17 08:07:45
  • 수정 2023-12-25 04: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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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묘와 석전대제/ 서울 문묘 지역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한다. 석전대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 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를 위한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한다.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지는 석전대제는 엄숙한 제례 절차와 함께 깅꽈 성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띤다.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승준 기자] 조선왕조의 성균관이 한양에 세워진 것은 건국 6년 뒤인 1398년 7월이지만 그 역사의 뿌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서는 태학(372년), 신라에서는 국학(682년), 고려에서는 국자감(992년)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됐다. 이름과 성격은 다르지만 최고 교육 기관이라는 점은 같다. 고려의 국자감은 이후 국학.성균관.성균감 등으로 불리다가 공민왕 11녀(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됐고 그 상태에서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의 ‘대사악’에서는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고 규정하고, 그리고 주소(각주)에서는 그 뜻에 대해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하마비와 탕평바각/ 비각 안의 탕평비는 1742년(영조 18)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지나친 당쟁의 지나친 폐해를 막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비문은 ‘두루 사귀어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乃君子之公心比而弗周寔小人之私意)’라는 의미를 지녔다. 비각 오른 쪽의 하마비에 새겨진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고려의 성균관은 성리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회헌 안향1243-1306)이 충렬왕 때 대성전을 세우면서 격을 한껏 높였다. 안향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상{畫像}을 구해 모셔놓고는 이에 따라 필요해진 제기와 악기 등을 구비해서 제를 지냈다. 안향은 자기에게 주어진 녹봉을 성균관에 희사(喜捨)했을 뿐만 아니라 노비 10명도 성균관에 기부했다. 이 노비들의 자손은 대대로 개성 성균관에 소속되어 봉사했고 조선왕조 들어서는 성균관으로 이속됐다. 


태조는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3년 뒤인 1395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묘, 사직, 궁궐(경복궁)을 창건한 뒤 1397년 2월 도평의사사에 명해 성균관의 터를 선정케 하고, 다음 달에 공사를 시작, 1398년 7월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완공된 성균관의 총 규모는 크고 작은 칸수가 96칸이었다고 한다. 


대성전과 그 주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 공간이다. 남쪽의 삼문(三門)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정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족 문으로 나오도록 했고, 가운데 문은 성현들이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 음식을 차리는 진사청, 하급 관리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다. 앞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 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다.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1543-1605)의 친필로 전해진다. 

하지만 성균관을 건립한 지 불과 1년 반 만인 정종 2년(1400)년에 불타버려 태종 7년(1407)에 재건됐다. 이때의 상황은 지금 대성전 앞에 자리한 묘정비에 새겨져 있는 변계량의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의 기본구조는 강학(講學) 공간인 성균관(成均館, 명륜당)과 향사(享祀) 공간인 문묘(文廟, 대성전)를 양대 축으로 이뤄졌다. 교학{敎學}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이면서 동시에 유교였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역대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성현은 모두 열여덟 분이어서 ‘동국 문묘 18현’이라고 한다. 조국 국초까지는 설총.최치원.안향 세 분의 위패만 동무와 서무에 모셔져 있었다. 문묘는 그 크기와 배향신위의 수에 따라 대.중.소가 있어 성균관의 문묘만 대설위(大設位)였고, 주(州).목(牧).군(郡)에는 중설위(中設位), 각 현의 향교와 서울의 4부 학당에는 소설위(小設位) 문묘가 세워졌다.  따라서 성균관의 문묘는 조선왕조 국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공간으로, 오늘날 성균관의 출발이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

# 조선시대 교육제도와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 갔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 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조선 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조선 시대의 교육제도를 살펴보면, 초등교육은 가정이나 사당에서 시작했고 중등교육은 전국의 모든 군현에 설치된 향교와 서울의 4부 학당인 동학.서학.남학.중부 등 5부로 나뉘었는데, 북부엔 끝내 학당이 설치되지 않아 4부 학당만 있었다. 


제기고


지방의 향교와 서울의 4부 학당에는 8세 이상의 양인 자제들이 입학할 수 있었고 여기에서는 시문(時文)과 ‘소학(小學)’을 비롯한 유학의 기본 경전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교육은 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과거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과거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두 단계가 있었다. 소과에서 치르는 시험을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했다. 


수복원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됐다.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한다. 영조 때 ‘속대전’이 편찬한 이후에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해 과거를 시행했다. 식년시 말고도 부정기적으로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열리는 증광시(增廣試), 임시로 시행하는 별시(別試)가 있었고, 국왕이 성균관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해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는 알성시(謁聖試)가 있었다. 


무과도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 시험을 치렀고, 시험과목은 궁술.기창.격구 등의 무술과 병서.유교 경전에 대한 강경으로 구성됐다. 이와 별도로 중인과 서출을 대상으로 기술관료를 뽑는 잡과도 있었다. 


진사청사마시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로 시행됐고, 경서를 시험하는 생원과(生員科)와 문장을 시험하는 진사과(進士科)로 나뉘었고 각 과에서 100명씩 합격자를 가렸다. 여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어 그곳에서 대과를 준비하며 공부했다. 조선시대의 소과급제자는 대부분 성균관을 거쳐갔다. 


대과 역시 초시와 복시를 거쳐 기본적으로 33명을 선발했다. 복시에 합격한 이들은 최종적으로 왕 앞에서 등위를 정하는 전시(殿試)를 치렀다. 전시에서 1등을 장원이라 했다. 



# 유생의 사회적 지위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부터 200명으로 정착됐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재정 부족으로 75명으로 줄었다가 영조 때 120명으로, 말기에는 위상이 낮아지면서 다시 100명으로 줄었다. 성균관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시행되는 사마시에 합격한 진사 100명과 생원 100명에 한해 입학이 허용되었으나, 성균관에도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보결생 제도가 있었다. 이를 기재생(寄齋生)이라고 했다. 


진사식당/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씩 찍어 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했다. 

기재생은 서울의 4부 학당 생도로서 정해진 시험에 합격한 승보기재(升補寄齋)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공신이거나 3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공덕이 있어 음서(蔭敍)를 통해 잊ㅂ학한 문음기재(門蔭寄齋)로 나뉜다. 이러한 기재생의 경우도 생원.진사 신분의 학생은 상재생(上齋生)이라고 했지만, 승보나 음서 출신 기재생은 하재생(下齋生)이라 불렀다. 이 외에도 왕세자들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왕세자 입학례’를 치렀다. 


어느 경우든 성균관 유생들은 숙식을 제공받는 국가 장학생이다. 성균관은 치외법권 구역으로 죄인이 성균관에 숨어도 포졸들이 들어가지 못했고, 성균관에 입학하면 군역(軍役)도 면제됐다. 나라에서는 학생들에게 장래의 선비로서 예우를 다해주었다.  


# 정조대왕의 ‘태학 은배 사서’


'명륜당' 현판과 정조의 글/정조가 성균관에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지은 시에 붙인 서문인 '태학 은배 사서'에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임금의 마음이 잘 표현되었다.

명륜당의 현판/명륜당 천정에는 수많은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어 이 건물의 중요성과 연륜을 말해준다. 




나라에서 성균관 유생들을 귀하게 생각했기에 역대 임금들은 수시로 성균관 거동에 알성시를 행하고 때로는 붓과 종이를 하사하기도 하고, 책이나 음식을 내려주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성균관에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지은 시를 붙인 서문인 ‘태학 은배 시서(太學恩杯詩序)에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임금의 마음이 역력히 들어 있다. 이글은 지금 명륜당 안 한복판에 현판으로 걸려있다.  


# 성균관의 수난과 복원


성균관은 창설 이후 강학과 제향을 차질 없이 시행하면서 설립 목적에 충실하게 장래의 인재를 길러냈으나,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성균관은 한차례 홍역을 치른다. 


존경각

성균관은 재위 9년(1503) 유생들 뒷간이 창경궁 후원이 가까우니 옮기라 했고, 제위 10년 5월에는 희첩들과 놀이를 즐기는 왕을 엿본다며 서재 바깥쪽에 화방벽을 쌓으라고 명했다. 또 같은 해 7월엔 원각사(圓覺寺)로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문묘를 철거하고, 성균관은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겼고 문묘도감이 세워지면서 동대문 밖에 있던 효령대군 손자인 가은군(加恩君)의 집에 일단 터를 잡았다. 공자의 위패는 의정부.종학.장악원.서학 등으로 옮겨다녔고, 문묘의 원래 대지는 군신의 연락 장소와 활터가 되었다.  


연산군 11월 1일 문묘를 후암동 부근으로 확정하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다음 해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중단했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



중종은 성균관을 복원했다. 재위 2년(1507)에는 도성밖에 버려진 공자묘정비를 다시세우고 재위 6년에는 비각을 세웠고, 중종 14년(1519)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웠으나, 임진왜란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정유 재란이 끝나고 4년 뒤인 선조 34년(1601)부터 복구작업이 시작돼 대성전이 먼저 중건되었고, 선조 39년에는 명륜당이 재건됐다.


하연대/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던 곳으로, 하연대 왼쪽의 커다란 동삼문은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평상시에는 닫혀있었다. 

이로써 성균관은 건물도 기능도 완전히 정상을 되찾았다. 이후 역대 임금들은 성균관의 부속 건물을 필요에 따라 하나씩 추가했고 유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여러 차례 거동하면서 많은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강학공간으로서 성균관의 기능은 끝났고 문묘의 제향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봄.가을  석전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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