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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근대를 걷다2] 전통사찰 지정 제75호 ‘팔달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11 05: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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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화전 측면에 '담배 피우는 호랑이와 시중드는 토끼 두 마리'가 해학적인 벽화로 남은 곳

용화전 측면에 '담배 피우는 호랑이와 시중드는 토끼 두 마리'가 해학적인 벽화로 남아있다. 

[박광준 기자] 공방거리를 빠져나온 뒤 남문로데오거리를 걷다 보면 빌딩들 사이에 다소 생경한 한옥 건축물이 나타난다. 전통사찰인 '팔달사'다. 용화전 측면에 '담배 피우는 호랑이와 시중드는 토끼 두 마리'가 해학적인 벽화로 남은 곳이다. 


수원은 전통도시 위에 식민도시가 건설되어 새로운 근대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일제강점기 팔달산 서남쪽에서 지금의 향로교와 매산로를 따라, 수원역, 서호, 권업모범장으로는 새로운 식민도시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되었으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수원사람들은 식민통치에 적극 저항하면서 새로운 미래로의 삶을 만들어 갔다. 


팔달사 일주문

팔달사는 선학원(禪學院) 소속 사찰로, 1895년(고종 32) 비구니 윤홍자 스님이 토지를 매입해 초가동 2동에 ‘팔달암’이라는 간판을 달고 기도해 오다, 1930년 12월 27일 용화전 작은 암자로 법당 상량후 사신각 1동을 건립해 150평의 작은 암자로 초기에는 조동종(曹洞宗)에 속해 있었다. 팔달사는 팔달산의 가장 큰 사찰로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도량이다. 


용화전 전경


팔달암이 선학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학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경허(鏡虛),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의 잦은 왕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 위치한 선학원에 출입하는 민족지도자들이 고등계 형사들의 사찰(査察)을 피해 이곳 팔달암에 숨어들어 연락책, 자금책의 역할을 담당해 화합을 갖기도 했고, 이후 1940년 6월 20일 팔달사 초대 창건주 이채순 보살이 재단법인 선학원에 토지와 건물을 증여하면서 선학원 소속의 사찰인 팔달선원(八達禪院)이 되었다. 



팔달사 초대 창건주 이채순의 뒤를 이은 창건주 범행(梵行) 스님은 도량 경내지 1,350여평을  매입해 오늘의 모습으로 혁신불사를 했고, 3대 창건주 승계 후 혜광(慧光)스님이 주지 재임 중에 3층 건물 매입과 경내 정화불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해 노후건물 7동을 철거하고 사찰 및 경내 마당을 정비해 전통사찰로서의 면모를 일신했고, 2층 건물(1층은 양옥, 2층은 전통목조) 및 적묵당, 일주문, 부처님 지신사리봉안 3층석탑 건립과 쾌불탱화(高 7.7m, 廣 4.3m, 석채)를 조성했다. 





범행 스님은 1948년 금산 대둔산 태고사에서 출가해, 1952년 팔달암에서 금오(金烏)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팔달선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찰은 대처승이 주지였으나, 수원에서 유일하게 팔달암은 비구승인 범행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6.25전쟁) 중 이곳 팔달암이 북한(개성) 피난민들의 피난처로 한동안 만남의 장이 되자 1952년 범행 스님은 이곳에서 피난민을 위로하면서 도심포교의 의지를 불태웠고, 또한 불교정화에 참여해 지방에서 오가시는 스님들이 숙식을 하면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산실 역할을 하는데 기여했다. 





불교 정화운동의 주역들이자 한국 근세 불교사에 우뚝 솟은 ‘불멸의 수좌’들로 금오(金烏), 효봉(曉峰), 동산(東山), 청담(靑潭) 스님을 꼽는다. 네 거봉 가운데 금오태전(법명은 太田, 1896-1968)은 움막과 토국에서 거지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일관했고, 이를 통해 ‘마음의 가난’을 실천해 마침내 철저한 무소유의 일상사가 마음의 무소유로 이어져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정각을 이룬 인물이다. 





1954년 5월 불교전화운동이 시작되면서 금오태전은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돼 전국의 비구, 비구니들을 서울로 집결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고, 정화 불사를 주도하던 중 이곳 팔달사에서 상좌들에게 “청정한 승단을 재건하여 참다운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구현해보자.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멀리 섬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을 보지 말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참선 공부만 하자”고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1954년 대한불교조계종 정화운동할 때 초대 봉은사 주지 겸 경기도 교무국장할 당시 각종 송사 문제를 종단 승소로 이끌자 종단에서 스님의 능력을 인정, 조계사 주지와 총무원 주요직을 여러 차례 겸임해 오늘날에 조계종단 정화에 기여한 분이다. 




1952년 범행(梵行, 1921-2012) 스님이 팔달선원의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연차적으로 인근 1,350평의 땅을 매입해  사찰 경내를 넓히고 건물을 지으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후 범행 스님이 봉은사, 조계사, 동화사, 수덕사 본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불국사 주지로 부임해 복원불사를 이룬 뒤, 1984년에 다시 팔달사의 주지로 오면서 새롭게 중창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범행스님 행적 


1950년 범행 스님이 계룡산 토굴에서 수행할 때 6.25 전쟁이 난 것을 훗날 알고 부모님이 걱정돼 고향에 가보니 인민군이 동민 60명의 손을 묶고 처형하러 가는 것을 보고 인민군 장교를 만나 이 사람들은 남의 집 농사만 짓고 가난하게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니 내가 신분 보장하겠다고 하자 동네 유지들도 함께 동조하여 죽음 직전에 다 풀려났다. 스님 집은 대지주였다. 그때 창고에서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팔달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이는 용화전(龍華展)은 팔작지붕 양쪽 용마루 끝에 거대한 용두가 앉아 있다. 용화전 벽에는 독특한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는 그림’이다. 무섭고 사나운 호랑이가 목에 힘을 잔뜩주면서 장죽을 물고 연약한 토끼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호랑이는 한국인의 정서상 친근한 존재 중의 하나로 민화로 자주 등장하는데, 토끼를 괴롭히는 무서운 호랑이를 마냥 공포스러운 대상이 아닌 다소 해학적인 웃음거리로 표현해내는 우리 조상들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팔달사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지만 주변에 팔달산이 있어 한적한 교외사찰 같은 특징이 있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경사지에 사찰이 들어 서 있어 높은 계단형 축대를 기준으로 상단에는 대웅전과 원당, 명부전, 종각, 영각이 위치해 있고, 하단에는 용화전과 6동의 요사체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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