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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29] 효행 근본도량 ‘화산 용주사[龍珠寺](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22 08:21:37
  • 수정 2024-04-02 04:5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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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됐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고,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고,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10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호성전(護聖殿).독성각(獨聖閣).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고,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 용주사의 가람구조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는 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부각되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고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됐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해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와 같이 칠성각과 제각, 대웅보전, 승당과 선당, 천보루와 외삼문을 중심골격으로 해 가람이 구성됐고, 각 전각의 내용에 따른 의미를 살펴본다면, 먼저 절이 중심이 되는 건물을 대웅보전으로 하고 거기에는 석가여래를 주존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셔놓았다. 대영웅 석가모니불과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아미타불, 그리고 무병장수를 발원하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것은 당시의 보편적인 일이었기에 용주사가 능사이기는 하나 여타의 사찰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대웅보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이 18세기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수미단의 화려한 장식, 본존불 상부의 용두 조각, 닫집 주변의 비천상 조각 등은 세련미와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단부, 즉 기단과 초석은 장대석 기단에 방형과 원형이 이중초석으로 돼있어, 당시 일반사찰이 잡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쓰고 있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보통 장대석 기단과 이중초석은 관청건축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됐던 것이다. 그밖에 기단 상면을 전돌로 깔았고, 지붕의 취두와 용두, 학과 용을 새긴 막새기와 등에서 관 건축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사원 건축으로서의 일반적 보편성과 아울러 궁궐건축의 특수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의 왼편에는 6칸의 칠성각과 12칸의 향로전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6칸의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칠성각은 시방칠등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향로전은 언젠가 소실된 후 본래 12칸이던 건물 규모를 6칸으로 축소해 봉향각으로 다시 세웠다가 1993년에는 천불전으로 고쳐 지어졌다. 향로전은 노전(爐殿)이라고도 하는 불전의 부속건물로 불전의 일상예불과 주요 불교신앙행사의 준비를 하는 곳이고, 이러한 일상예불은 노전스님이 담당한다. 대웅보전 오른편에 제각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추측되는 건물이나,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서고로 쓰이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고 호성전, 또는 축성전으로 불리우던 이 제각의 소실은 용주사의 창건의미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현재 대웅보전에 있는 목조감실이 위패를 모셔놓았던 것으로 생각되어 그 자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 단에는 천보루와 승당 및 선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천보루는 아래층을 모두 돌기둥으로 쓰고 있다. 누각의 2층은 삼면을 난간으로 돌리고 4각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장초석과 지붕위의 용두 등은 조선시대 사찰건축에서 보기 어려운 요소로 관 건축의 취향을 느낄 수 있고 누각건물 자체는 일반사찰의 누각과 그 유형을 같이해 사찰건축과 관 건축의 모습이 절충된 외관을 구성하고 있다.


승당과 선당은 천보루의 좌우에 위치해 대웅보전 앞 중정을 구획짓고 있으며, 천보루의 양옆에서 각각 통할 수 있는 행각과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절의 중앙부에 □모양의 건축구조로 쌍둥이처럼 대칭을 이뤄 지어진 두 건물은 각각 39칸이나 되고 있어서 용주사가 선종사찰로서 적지않은 승려가 이곳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승당과 선당은 지금 나유타료와 만수리실로 불리운다. 아랫단의 삼문은 좌우로 줄행랑이 달려 있어 일반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취하고 있다. 이는 육상궁과 같은 별묘(別廟)의 삼문형태이다. 또한 용주사의 가람구조는 조선시대에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던 능사로서 봉선사와 봉은사의 구조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해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했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 삼문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된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이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이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했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고,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한다.


# 불음각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해 놓았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 됐는데 그 소리가 영롱해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다.


# 천보루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뤄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돼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돼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이다.




나유타료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다. 한편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부처가 알지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과정일 뿐이니

다시 부모미생전의 한구절로 도는 시험해보세.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현재 대중회의때 사용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다. 큰 방 내부의 중앙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다. 용상방은 결제(結制)나 큰 불사가 있을 때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 직책과 해당자를 명시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이다. 내용을 보니 조실(祖室)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직명과 스님이름이 적혀있어 중앙선원을 중심으로 한 편제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전강대선사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선원장인 송담선사께서 당신생존까지는 선사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던 까닭이라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성이라 하겠다.




만수리실은 원래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해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덕무가 쓴 만수리실의 주련이 당시 있었으니 그 글귀에


‘도솔궁속에서 큰 게송을 말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반야대위에서 참된 법을 연습하여 무량겁을 초탈하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라고 했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뤄져 객실로 사용한다. 천보루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익공계 이익공이 섬세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인다.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진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됐다.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다. 창건당시 천보루의 앞뒷면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을 달았었다. 




누각의 내부중앙에는 번암 채제공이 찬술한 '용주사상량문'이 목판으로 판각돼 있다. 측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목어가 잉어 모양으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살아있는 듯이 걸려있다. 목어는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안온시키기 위한 것으로 조석예불과 각종 의식때 두드리는 것이다. 내부는 82평으로 현재는 각종 법회, 특히 용주사 어린이, 청년회 등의 정기적인 법회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천보루는 하나의 궁궐건축으로 지어졌고 건물명칭이 그러하고, 궁궐과 같이 난간을 둘렀고 좌우로 연결된 나유타료.만수리실이 이를 말해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참배했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규모로 지어진 건물이다. 1993년 5월 외부단청을 새롭게 해 화사한 빛깔이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나타내는 듯 하다.


# 5층석탑과 세존사리탑


용주사에는 모두 2개의 석탑이 있는데 그 하나가 효행박물관 쪽에 위치한다. 전체높이 4.5m의 이 화강암 5층석탑은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 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역시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임을 알게 한다.


5층석탑

제일 아래에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사방 각 면에는 귀꽃모양의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고 그 위 기단면석에는 위패(位牌)형의 사각을 모각했다. 1층옥신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고 1.2.3층의 옥개석 모두에는 4단씩의 옥개받침이 있으나 4층만은 2단으로 이뤄졌다.


5층의 옥개석과 맨 위의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써 조성해 간략화했고 각 옥개석의 처마끝에는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전이 없는 수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기단부에 안상이 있고 대체로 체감률이 적은 탑의 특징 등에서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석탑과 함께 또하나의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5층석탑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했다고 한다.


세존사리탑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됐고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됐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됐고,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진시 사리가 봉안돼 있는 사리탑은 용주사를 참배하는 모든 불자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다음회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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