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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30] 효행 근본도량 ‘화산 용주사[龍珠寺](2)의 ’대웅보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1-24 03:14:38
  • 수정 2024-04-02 04: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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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됐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다.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10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고,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회에 이어 이번에는 대웅보전에 대해 살펴보자. 


# 대웅보전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으로,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볼 때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이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했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로,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 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해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라고 쓰였었다.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했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비운(飛雲).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절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으로 융릉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졌던 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공장(工匠)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고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다.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했고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해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됐다.


# 닫집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에 삼세불과 후불탱화를 옹휘하고 있다. 닫집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원래 불전은 참배객이 들어설 수 없는 부처님만의 신성공간이다.


부처님은 한없이 존귀하고 성스러운 분이므로 감히 세속의 중생이 부처님 코앞에 다가간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으므로 전각내의 불전과 오늘날과 같이 부처님이 뒤쪽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이 아니라 건물의 정중앙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닫집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부처님을 더욱 가까이서 뵙고자 불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뒤로 물러나게 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사원 건축에서 새로이 누각과 배례석(拜禮石)이 등장했고, 참배객이나 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사람은 문전에서 멀리 떨어진 누각이나 불전앞의 배례석에서 예를 올려야 했다.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했는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다. 불단,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닫집도 또 하나의 불국토를 의미한다.


결국 이 셋이 조화를 이루어 보다 넓은 공간으로서의 불국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 대웅보전의 기록으로는 홍천호(洪天浩)가 찬한 ’대웅전상량문(大雄殿上樑文)‘과 닫집내부에서 발견된 대웅보전 원문(願文)이 남아있다.


# 삼세불상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석가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다.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했다.



대웅전의 닫집속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보면 불상조성의 시말을 알 수 있다. 불상조성은 상계(商界).설훈(雪訓).계초(戒初).봉현(奉玹)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해 1790년 8월 16일 처음 시작, 9월 30일에 완성했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1일에 나라안의 명승을 초빙해 점안식을 거행했고, 또한 위의 기록보다 후에 작성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 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는 다음과 같이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방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尙植),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 통정 계초(戒初)가 각 조성했다. 삼세불상은 이처럼 조각자가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상호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오른손에 약그릇을 들고 왼손에 설법인을 쥐고있다 .



한편 당시 대구 동화사(桐華寺) 승려였던 인악대사 의첨(義沾, 1746~1796)스님이 왕명으로 삼세불상의 복장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株寺佛腹藏奉安文)‘을 지었는데, 국왕의 성은을 칭송하고 왕실의 안락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스님이 찬한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 ’경찬소(慶讚蔬)‘가 ’인악집(仁嶽集)‘에 전하는데 정조가 이 글들을 읽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석가, 약사, 아미타부처님은 우리 나라 불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되어 왔다.


특히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 만으로도 서방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易行道)로서 크게 신앙되었다.


# 후불탱화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이다.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한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했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라는 은자서(銀字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는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녹색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했고 선의 처리는 다소 필력이 약해 박진감과 생동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적, 도식적인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과장없는 인체비례, 사실적인 얼굴표현, 침착한 설채법(設彩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화승(畵僧)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불화의 제작자에 대해서 과거부터 김홍도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됐다는 이론도 있다. 즉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 중의 "민관(旻寬).상겸(尙謙).성윤(性允)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라는 기록을 증거로 김홍도가 아니라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이설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후불탱화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또하나의 자료인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대웅보전보탑후불탱삼세여래체탱 화원 연풍현감김홍도(大雄寶殿寶榻後佛幀三世如來體幀花園延豊縣監金弘道)라고 적고 있다.


먼저 대웅전 닫집 발견 원문은 1790년 10월7일 대웅보전에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시말을 적은 것인데 민관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고만 했지 구체적인 제작의 과정은 생략했고, 두번째의 자료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부모은중경 석판.동판이 봉안된 1802년 직후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각 전각의 도편수와 단청장, 탱화와 불상의 제작자 등을 자세하게 실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대가 앞선 기록물이 중시되어야 하지만 여기서의 경우는 몇가지 점에서 뒤늦게 작성된 후자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 그 예로서 첫째, 제작에 참여한 인물과 화풍의 문제로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했던 상겸은 당시 정조대의 유명한 화승(畵僧)으로 이보다 앞선 1782년에 충남 예산 향천사(香泉寺)의 지장보살도를 그렸고, 1790년에는 용주사의 후불탱화와는 그 화풍이 전혀 다르다. 또한 상겸과 함께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한 민관이라는 스님은 1790년 용주사의 삼장탱화 조성자에도 그 이름이 들어있는데 지금도 삼장탱화는 잘 보존되어 있어 후불탱과 비교해볼 때 화풍에 큰 차이가 있다.


둘째, 김홍도의 작이라고 하는 것은 상기의 기록과 함께 무엇보다도 후불탱이 지니고 있는 화풍이 그의 다른 도석인물화와 거의 같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 미술사가 최완수(崔完秀) 선생의 말을 빌리면, 우선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 권속들의 얼굴표현이 바로 단원풍의 얼굴모습들이며 길쭉한 정도로 긴 윤곽에 우리 얼굴치고는 코가 너무 크다고 할 만큼 우뚝솟은 콧날을 가진 청수한 용모가 그것인데 이 얼굴 모습은 아마 단원 스스로의 용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연하고 날렵하게 젖혀지는 손목의 표현이나 그에 비해 무미하다고 할 만큼 아무 변화없이 미끈하게 처리하는 팔뚝표현도 단원만이 가지는 인체표현의 특징이고 세장한 손가락과 고운 발 맵시 역시 단원 인물화에서 보이는 품위있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인 듯 유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當風勢)의 옷자락 표현이 또한 단원 인물화임을 증명해준다. (<月刊朝鮮> 1989년 7월호 pp. 575~576. 名刹순례 14. 수원 花山 龍珠寺) 또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에 적혀있는 주상전하, 자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는 각각 정조와 생모인 혜경궁 홍씨,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 왕세자였던 순조를 가리킨다고 했다.


김홍도(1745~ ?)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진경산수(眞景山水),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풍속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독창적 화풍을 이룩함으로써 한국화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당시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인 1788년에는 왕명으로 금강산 등을 기행하면서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고 용주사가 창건된 직후인 1791년에는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해 그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 정조에게서 "그림에 관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관하게 했다."고 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


이처럼 정조대에 최고의 화가였고 또 왕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용주사의 창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또 그 능사로써 용주사를 세우는데 당대 최고의 승려와 각종 기술자를 초빙하고 물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홍도는 대웅보전 의 후불탱을 제작했고 1796년에는 ’불설부모은중경판‘의 변상도를 그리기도 했다. 또한 절에 소장되어 있는 4폭의 김홍도가 그린 병풍도 이 무렵에 왕에게서 하사된 것이다.


결국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은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민관.상겸.성윤 등의 25인이 참여해 제작됐다. 끝으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은 사자관 글씨체인데 김홍도가 주관자였으므로 그가 직접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삼장탱화


대웅보전에 들어와서 오른쪽 벽면에 서면 특이한 탱화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불화인 삼장탱화이다. 지장탱화가 발전해 확대된 형태라고 여겨지는 이 불화는 삼장탱화 혹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라고 불리며 지장도, 십왕도(十王圖)와 함께 지옥계(地獄系) 불화에 속한다.


삼장은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보살(持地菩薩)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 세 보살의 법회를 동시에 한 화면에 도설한 것이 삼장탱화이다.


천장.지지.지장보살은 각각 천상.지상.지하의 삼계교주(三界敎主)로 신앙된다.


사실 이 삼장보살의 명칭이나 도상(圖像)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재래를 수용해 삼계우주관(三界宇宙觀)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삼장탱화는 조선중엽 이후 후기에 걸쳐 유행했는데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이 불화는 가로 318㎝, 세로 173㎝로 비단에 채색했고, 화면은 수평으로 이등분해 상단에 세 분의 보살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권속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이 권속들이 상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점이 다른 삼장탱화와 구별된다.


화면의 가운데는 천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천장회상(天藏會上), 왼쪽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회상(地藏會上), 오른쪽에 지지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지회상(持地會上)을 그리고 있다. 천장회상을 보면 청련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천장보살이 보주형 신광과 두광에 둘러싸인 채 양손은 경책을 감싸쥐고 있다. 천장보살의 좌대아래에는 두 보처보살이 있는데 왼쪽에는 진주보살이, 오른쪽에는 대진주보살이 위치한다. 두 보살의 좌우에는 천녀 2위가 보인다. 천장보살의 좌우에는 종(從)으로 배치한 각각 3인씩의 천중이 있다.



화면 왼쪽에 있는 지장회상에는 지장보살이 역시 같은 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대좌아래에는 왼쪽에 무독귀왕(無毒鬼王), 오른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있다. 그들 왼쪽에는 명부시왕 6위가 있고 왼쪽 제일 상부에는 왼쪽에서부터 명부장군(冥府將軍).사자(使者).판관(判官)이 나란히 배치되고 있다.


화면 오른쪽의 지지회상을 보면 지지보살이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광배는 두 보살의 것과 크기나 형식이 동일하다. 왼손에는 경책을 들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지지보살의 좌대 아래에는 좌우보처로 보이는 신장상이 있다. 왼쪽에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오른쪽에는 유동보살(儒童菩薩)이 배치됐다. 이들의 오른쪽에는 금강상과 신장상 6위가 있고 지지보살이 신광과 두광옆에 각각 1위씩의 신장상이 있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의 제작에는 민관(旻寬).관인(寬仁).□평(□平).처성(處性).의윤(義允).□명(□明).영렬(英埋).세영(世英)등 총 8인의 화승이 참가했다. 이들 중 민관은 대웅보전의 후불탱화 제작에도 참가했던 화승이었다. 전체적으로 홍색과 녹색이 주조이나 짙고 탁해서 선명도는 떨어지는 편인데 인물과 옷주름은 도식화가 심해졌고 구도도 다소 느슨해진 감이 있다. 즉 19세기의 형식화.도식화 된 불화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 할 것이다.


삼장탱화는 18세기말엽을 지나면서 거의 만들어지지 않아지만 중단탱화(中壇幀畵)로 분류되면서 지장탱화로 독립하거나, 신중탱화속에 수용되어 그 자취를 찾을 수 있게 됐다.


# 신중탱화


신중탱화는 법당의 좌 우측 벽면에 봉안하는 불화로, 신중탱화에서 묘사된 호법신(護法神)들은 부처님의 세계, 불법의 세계를 보호하는 신들이다.


특히 우리의 재래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다른 불화들과 비교할 때 전통적 특성이 강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엄신중신앙(華嚴神衆信仰)에 바탕을 둔 39위 신중 탱화가 원형을 이루는데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과의 결합으로 104위 신중탱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신중탱화는 대체로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로 대예적금강신(大穢蹟金剛神)을 주축으로 왼쪽에 제석천(帝釋天)을, 오른쪽에 대범천(大梵天)을 두고 그 아래에 동진보살을 놓는 형식이다. 둘째로 제석천.대범천 동진보살의 3위를 중심으로 하는 형식이고, 셋째로 제석천과 대범천을 중심으로 배치한 형식이다. 마지막으로 네번째의 형식은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한 탱화들이다.


용주사 대웅보전내에 봉안된 신중탱화는 대예적금강신을 주축으로 하는데 1913년 제작의 가로 210㎝, 세로 198㎝ 비단에 채색한 작품이다. 신중탱화는 상단.중단.하단의 삼단구조로 도설하는 것이 상례이다. 용주사의 신중탱화 또한 이러한 삼단의 구조를 지니며 회학적으로는 수평의 2단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도설의 구조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상단에는 금강 2위, 십대명왕중 명왕(明王) 2위를 배치하고 중단에는 대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동진보살과 금강역사를 하단에는 제신장(諸神將)과 천녀 넷을 도설했다.



중앙의 대예적금강신은 화염형(火焰形) 거신광(擧身光)을 배경으로 앉았는데 각 네 마리씩의 청룡과 황룡에 둘러 쌓여 있고 6개의 손에는 금강저(金剛杵).금강령(金剛鈴).법륜(法輪).보검(寶劍)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4각의 얼굴에는 9개의 눈이 그려져 있고 송곳같은 긴 치아를 드러내고 있어 불법의 수호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왼쪽의 재석천은 손에 연꽃을 들고 서있고 왼쪽 상부에는 손에 보주를 든 금강상과 그 아래에 2인의 천녀가, 왼쪽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 중의 1위가 있고 그 아래에 명왕이 있으며 그 왼쪽에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3위의 신장상이 배치돼 있다. 


오른쪽의 대범천왕은 합장을 한 채 서있고 오른쪽 제일 상부에는 금강상이, 그 아래에는 2인의 천녀가 있다. 범천의 두광옆에 신장 2인, 왼쪽 아래에는 명왕, 오른쪽에는 신장을 놓고 있으며, 화면의 하단에는 동진보상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신장 2위, 금강역사 2위가 있고 오른쪽에도 동일하게 배치했다. 전체적인 색조는 붉은 색이 주조이며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 등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화기에 의하면 고산(故山).축연(祝宴) 두 분이 탱화불사의 붓을 잡으셨던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화기에는 불화 제작 당시 절의 대중이 36인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신중탱화의 역할을 그 범위를 넓혀 참배자의 심성에 내재한 온갖 잡신을 쫓음으로써 인간심성에 청정함을 갖게 해 이것이 곧 또다른 호법(護法).호신(護身)의 길임을 깨닫게 한다. 신중탱화를 마주하고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백색과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관음탱화를 보게되는데 1971년에 만들어진 이 관음탱은 중앙에 백의관음을 모시고 왼쪽에 선재동자, 오른쪽에 천녀를 두었다.


# 감로왕탱화


감로왕탱화(甘露王幀畵)는 조상숭배 혹은 영호숭배의 신앙을 중심으로 묘사된 불화로 영화(靈駕)의 국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을 도설했기 때문에 영단탱화(靈壇幀畵)라고도 하고, 아귀나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甘露味)를 배푼다는 뜻에서 감로탱화라고도 한다.


감로왕은 바로 극락세계이 주불인 아미타불이고 감로는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이르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중기 이후부터 많이 봉안된 이 감로왕탱화는 불교의 여섯 세계 아귀의 세계를 묘사한 불화로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을 아귀의 세계에서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근거한다고 해서 우란분탱화(盂蘭盆幀畵)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불교가 유교의 효(孝)사상과 결합함에 따라 우란분회가 널리 성행하게 됐고 그 탱화의 제작 또한 많았는데 감로왕탱화는 지옥이나 아귀도에 빠진 가족친지들을 위해 우란분재를 올림으로써 지옥의 고통을 벗고 극락에 왕생한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가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이 감로왕탱화를 봉안했던 것이다. 가로 309㎝, 세로 156㎝로 비단에 채색했고 1790년 당시 제작에 참여한 화승은 상훈(賞勳).성완(性琓).홍민(弘旻) 등 11인이다.



불화의 도설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상단에는 중앙에 칠여래(七如來) 입상을 배치했다. 이 칠여래는 망자(亡者)의 영혼들에게 극락왕생의 길을 열어주며 그 명호(名號)는 나무다보여래(南無多寶如來), 나무다보승여래(南無多寶勝如來), 나무묘색신여래(南無妙色身如來), 나무광박신여래(南無廣博身如來), 나무이포외여래(南無離怖畏如來), 나무아미타여래(南無阿彌陀如來)이다.


칠여래 오른쪽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배치됐다. 이 보살이 바로 그림 아래에 묘사된 망자의 영(靈)을 맞아 극락세계로 내영(來迎)한다. 그 주위에는 천녀와 수레등이 묘사되어 있고 칠여래 왼쪽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시립하면서 그 주위에 천녀들에게 둘러싸여 극락내영하는 무리들이 묘사되어 있다. 칠여래 바로 아래에는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한 성반(盛飯)이 있고, 그 아래에 제의식(薺儀式) 모습과 상제사인(喪制四人)이 보인다.


성반 왼쪽 아래에는 아귀상이 하나 있고, 극락내영하는 무리들 아래에는 세속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고 반대편의 지옥문을 들어서는 많은 망자들의 행렬 바로 위에는 지장보살이 지옥중생의 구제를 위한 대원(大願)을 세우고 있다. 그 아래에 육아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줄타기.탈춤 등의 놀이에 모여든 구경꾼과 농부 등이 보이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속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복식(服飾)을 하고 있으며 명계(冥界)에 있는 무리들은 고려시대의 복식을 하고 있어서 현실과 과거의 모습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시대감각이 다시 한번 이 불화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 감로왕탱화의 설경(說經)인 우란분경은 부모은중경과 함께 불교의 효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부모은중경이 현실세계의 효를 중시한다면 우란분경은 사후나 과거세계의 부모를 위한 것이고,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의 발원이 바로 용주사의 감로탱화이다. 그러나 현재는 도난당해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못함은 정조의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앗아간 것이므로 비어있는 감로왕탱화 자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 괘불



괘불은 대웅보전의 불단위 괘불함속에 들어 있다. 괘불함의 명문에 의하면 이 괘불은 강원도 유점사(楡岾寺) 낭은경천(廊隱敬天) 스님과 용주사 성덕(晟德).성봉(晟鳳)스님이 금어(金魚;畵帥)를 맡아 1939년 5월 26일에 시작해 6월30일에 완성됐고 재질은 종이로 가로 398㎝, 세로 734㎝ 규모이다.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 때 사용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초파일이나 큰재(齋)와 같이 십대제자, 각종 성중.권속 등을 모두 생략하고 다만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가섭존자, 아난존자만을 도상했다. 전체적으로 녹색과 적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화면의 상단에는 오색구름이 상서롭게 비추고 석가불은 설법인을 취하고 가섭과 아난은 합장의 자세를 지녔다. 둘 다 부처님의 설법에 환희심을 발하는 듯 밝은 표정이다. 하단 전면과 좌우에는 화기가 있고 증사(證師), 회주(會主), 금어(金魚) 등의 조상법회(造像法會) 참여자와 많은 시주자들이 이름이 보인다.


# 목조감실


대웅보전에는 6각 당형(堂形)의 목조감실 2개가 소장되어 있다. 너비 81㎝, 높이 223㎝로 지장전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감실은 감(龕)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불상 등을 안치하는 구조물이다. 석탑의 탑신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처럼 건축물의 일부로서 마련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웅보전의 감실은 조선후기 작품으로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기는 하지만 정교한 조각술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상부의 절병통은 활짝 핀 연꽃봉오리 모양이고 지붕은 급한 경사로 내려오다가 처마끝에서 큰 반전을 이룬다. 처마밑의 공포는 건축물의 그것과 같이 세밀하고 견고하게 짜맞추었고, 모서리는 여섯 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기둥의 중간을 난간처럼 구획해 마치 2층의 누각처럼 보인다.


기둥과 기둥사이는 막힘이 없어 6면에서 모두 감실내부의 봉안물이 보이도록 했다. 보통 감실에는 불상을 안치하지만 유교제례에서는 위패가 놓여지기도 한다. 원래의 감실은 축성전(祝聖殿)에 있었으나 이후 지장전에 옮긴 것으로 축성전이 라는 명칭으로 보아 이곳에는 군왕의 위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형태와 규모의 감실이 2개이므로 두 분의 위패를 모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와 그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위패일 가능성이 크고, 혜경궁 홍씨가 돌아가신 해는 1815년이므로 제작시기는 그 무렵일 것이다. 현재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용주시 홈페이지 캡처/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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