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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이야기 31] 병자호란때 빈궁을 모시고 피살당한 '충헌공윤전재실'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1-26 05:37:22
  • 수정 2024-01-26 05: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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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충헌공윤전재실은 조선 초기 문인인 충헌공 윤전(1575~1637)의 묘를 관리하고 재사를 지내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윤전의 본관은 파평으로 윤창세의 아들로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시호는 충헌으로 이괄의 난 때에는 공주로 피난하는 인조를 모셨고, 정묘호란 때에는 김장생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병자호란 때 빈궁을 모시고 강화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현재 재실과 충헌공 윤전 묘소가 노성 병사리에 자리해 있다.


     ▲ 충헌공윤전재실 전경, (충남 문화재자료) 파평윤씨종중 소유로 후손 윤덕중, 윤여문이 관리 하고 있으

     며, 논산시 노성면 명재로 428-52 (병사리에) 소재해 있다.


충헌공 윤전 재실(忠憲公尹전齋室)은 조선 초기 문인인 충헌공 윤전(1575~1637)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윤전의 호는 후촌, 본관은 파평이다. 성혼의 문인이자 윤창세의 아들로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급에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당쟁으로 의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1624년 (인조 2) 이괄의 난 때에는 공주로 피난하는 인조를 모셨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김장생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빈궁을 모시고 강화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송시영.이시직 등과 함께 자결하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윤전은 인정이 두터우며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충헌공윤전재실 문간채


     ▲ 충헌공윤전재실 안채


     ▲ 충헌공윤전재실 문간채      


윤전 재실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800년대에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라고 전해진다. 건물의 형태는 'ㄱ 자형' 안채와 'ㄴ 자형'의 문칸채가 '튼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윗방, 건넌방, 부엌 등을 들였고, 문간채에는 중문을 중심으로 문간방과 물건을 넣어두는 고방 그리고 헛간 등이 있다. 간결한 삼량집으로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건물로 한쪽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다른 한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네모난 것을 사용하였으며 옆면과 뒷면을 단순하게 지었다.


충헌공윤전재실의 건축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800년대에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라고 한다.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시호란 임금이나 이름난 유학자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리어 주는 이름이다.

삼량집이란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가로지르는 나무가 하나만 있는 건축물이다.


      ▲ 충헌공 윤전묘소


      ▲  충헌공 윤전신도비


                    ▲  충헌공 윤전신도비


재실은 한 문중의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의 묘소, 또는 지파(支派)의 회전(會奠) 근처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능으로는 첫째, 시향제나 묘사의 준비 장소로서의 기능, 둘째, 선산·종산·위토 등 문중 공유 재산 문제, 셋째, 재실의 유지나 수축 문제, 넷째, 유사나 산지기의 문제, 그리고 그해 제례 과정 전체 평가 등을 논의하는 종회 장소로서의 기능이 있다. (출처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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