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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31] 논산 반야산 기슭에 위치한 관촉사 '은진미륵'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1-26 19:37:49
  • 수정 2024-04-02 04: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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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논산 관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반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는 목조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다. ‘사적기’에 의하면 1386년(우왕 12) 법당과 정문이 중건됐고, 1581년(선조 14)에는 백지가, 1674년(현종 15)에는 지능이, 그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성능이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국내에서 가장 큰 불상인 은진미륵(국보)으로 유명한 사찰로 석등(보물), 배례석(충남도 유형문화재), 석문(문화재자료), 사적비, 석탑,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일주문, 천왕문, 명곡루, 미륵전, 윤장대, 대광보전, 삼성각, 요사 등이 자리했다.


반야산 중턱에 위치한 관촉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백호에서 발한 빛이 세상을 비추어 중국의 명승 지안대사가 찾아와 그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관촉사’라 했다.


    ▲ 일주문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관촉사 천왕문


사천왕은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우리나라의 천왕문 내에 있는 사천왕의 지물(持物)은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오른손에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의 제외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의 경우에 등 칼, 창, 금강저, 탑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천왕문은 사찰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갖게 하려는 뜻도 있고, 또 상징적 의미는 일심(一心)의 일주문을 거쳐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있다. 


    ▲ 관촉사 사천왕


사천왕은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우리나라의 천왕문 내에 있는 사천왕의 지물(持物)은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오른손에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의 제외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의 경우에 등 칼, 창, 금강저, 탑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천왕문은 사찰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갖게 하려는 뜻도 있고, 또 상징적 의미는 일심(一心)의 일주문을 거쳐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뜻도 있다.


                      ▲ 관촉사 석문(해탈문 )(문화재자료 제79호, 조선시대)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맨 위쪽에 세워진 석문으로 해탈문(解脫門)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석문으로 '해탈문'이라고 부른다.


문 입구의 양쪽 돌기둥은 직사각형의 돌을 양쪽 기둥으로 세웠고, 윗면 천장은 길게 다듬은 돌 5개를 가로로 걸쳐 얹어 4각형의 천장을 이루어 터널의 모습과 비슷하다. 천장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재를 다듬어 벽돌 쌓은 형식으로 쌓았고, 입구의 양옆으로도 벽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하는 석벽의 모양을 내었다. 


관촉사가 건립된 후 참배객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위해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는데, 그중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남아 있다. 석문을 세운 시기의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조성한 사찰 내의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관촉사 종루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삶으며 듣는 순간 삼계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적 의미와 또는 특별한 사건이 있음을 알리는 실용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종소리를 듣고 법문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생사의 고해를 넘어 불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관촉사 윤장대 (사진=충청메시지)


윤장대는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하는 회전식 불경보관대가 세워져 있다.                                                 


    ▲ 관촉사 미륵전


    ▲ 관촉사 미륵전 내부에서 본 전경


                       ▲ 관촉사 미륵전 내부에서 본 전경


미륵전은 앞이 투명한 유리로 돼 있어 은진미륵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전각이다.


                    ▲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 (2018년 4월 20일 지정)


                   ▲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 (2018년 4월 20일 지정)

           

                  ▲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 (2018년 4월 20일 지정)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8m에 이르는 국내 최대 석불로서 보통 ‘은진미륵’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56역 7천만년이 지난 뒤에 나타난다는 부처이다.

 

#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설화


관촉사 사적비 기록에 의하면, 968년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던 여인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 보니 거대한 바위가 솟아 있었다. 이에 광종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부처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 큰 돌을 어떻게 세울 수 있었을까?


불상이 너무 커서 이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두 명의 동자가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동자들은 평지에 불상의 아랫부분을 먼저 세운다음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불상의 가운뎃부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훗날 이마을은 모래 사다리라는 뜻으로 '사제촌'이라고 불렀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허리 부분을 경계로 두 장의 돌로 구성돼 있다. 허리를 경계로 하체와 상체를 분리하여 두 개의 바위로 조각한 다음 서로 연결한 것이다. 


사찰의 사적비에 의하면 970년(광종 21)에 광종의 명을 받은 조각장 혜명(慧明)대사가 석공 100명과 공사를 시작해 37년만에 1006년(목종 9)에 불상을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2018년 4월 20일 국보로 승격했다. 


조선 후기의 ‘관촉사사적기’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각 부위의 수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상의 높이는 55척(尺) 5촌(寸)이며, 둘레는 30척, 귀의 길이는 9척, 미간(眉間)의 폭은 6척, 입의 크기는 3척 5촌, 보관(寶冠)의 높이는 8척, 대개(大蓋)의 폭은 11척, 소개(小蓋)의 폭은 6척 5촌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미륵보살’이니 ‘관음보살’이니 하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으며, ‘불상’으로만 기록돼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성현(成俔)의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에 보이는 ‘관촉사’라는 시 외에 많은 시인에 의하여 회자되곤 했다.


*1척(尺)은 33.3333cm이다. *1촌(寸)은 1척(尺)의 10분의 1로 약3.03cm에 해당된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인 968년경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통적인 불상이나 보살상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이 보살상이라는 것은 장방형의 보관(寶冠 : 보배로운 모자)을 쓰고 있다. 양쪽 귀를 살짝 덮고 흘러내린 세 가닥의 머리카락, 지인(持印 : 물건을 들고 있는 손 자세), 오른손 손목에 보이는 팔찌가 입증해 준다.

 

불상의 모습은 머리와 손을 강조한 표현양식으로 인해 자비로운 보살이라기보다 토속적인 신의 모습을 보는 듯 위압적이며,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불상은 이상적인 우아함을 추구한 신라 불상과는 달리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보이는 새로운 양식으로 불상 전체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힘은 고려 초기에 널리 유행한 불교 예술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은진미륵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조성된 석불 입상의 모델이 됐다.


                  ▲ 관촉사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 고려시대)


                   ▲ 관촉사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 고려시대)

                    

                   ▲ 관촉사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 고려시대)


석등이란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을 밝혀주는 등이다. 처음에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으나 후대에는 불전이나 탑앞에 설치하는 장식적인 건조물로 변했다. 

 

정사각형의 하대석(下臺石)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다. 기둥돌은 둥근 형태의 상.중.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상하 2층으로 돼 있다.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火窓)이 매우 넓다. 1·2층 지붕돌의 네 귀에 귀꽃이 큼직하게 서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8각이 혼합돼 구성 됐고 ,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또한 화사석의 기둥이 가늘어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형태의 장대함과 수법의 웅장함이 고려시대 제일가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비에 의하면 불상이 968년(고려 광종 19)에 조성 됐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석등의 대표작이다. 


                   ▲ 관촉사 배례석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고려시대)


관촉사 배례석(灌燭寺拜禮石 유형문화재 제53호)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던 곳에 놓은 직사각형의 받침돌로 바닥에서 2단의 직각 괴임을 새기고 , 그 사방의 면석에는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의 그보다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 새김 했다. 연꽃은 단판 8옆이며 중앙에는 커다란 둥근 자리가 있고, 그안에는 가운데 1개와 그 주위에 8개의 자방이 연주문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으로 새겼다. 연꽃의 잎 끈이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의 연꽃잎을 뾰족하게 돋을 새김 했다. 

 

제작연대에 대한 이설이 많으나, 제작기법으로 보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 관촉사 오층석탑


                   ▲ 관촉사 사적비(조선후기)


                   ▲ 관촉사 사적비(조선후기)


관촉사 사적비는 관촉사의 상징인 은진미륵 및 정문과 법당의 조성 경위를 밝히고 있는 사적비로서, 1743년(영조 19) 승려 각혜와 속인으로 구성된 불량계원(佛粮契員) 다수가 참여하여 세운 비이다.

 

관촉사 사적비에는, “968년(광종 19) 사제촌의 여자가 반야산 서북쪽 모퉁이에서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는데, 홀연 동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보니 큰 돌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사위에게 말하니, 사위가 곧 현감에게 고하였다. 관에서는 조사와 함께 회의를 통하여 “이는 반드시 불상을 만들 징조다.”라는 결론을 얻고 사신을 팔로에 보내어 공사를 맡을 사람과 부처상을 만들 사람을 구하여 혜명이 천거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장인 100여 명을 선발하여 968년(광종 19)에 일을 시작해서 무릇 37년이나 경과한 1006년(목종 9)에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몸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중국의 승려 지안이 이를 보고 쫓아와서 ‘광명이 동시에 서로 응한다’라고 하여 관촉사라 하였다.”는 은진미륵과 관촉사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관촉사 사적비는 화강암으로 변이 115㎝인 대석 위에 80×57㎝ 크기의 방형 비좌를 마련하였고,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은 높이 133㎝, 폭 60.5㎝, 두께 30.5㎝의 크기로 측면에 ‘관촉사사적비명’이라 새겨져 있다. 우진각 지붕 모양의 옥개석은 80×97㎝ 크기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관촉사 대광명전


대광명전은 2층으로 보이나 단층으로 되어 있다.


                    ▲ 관촉사 대광명전 내부


대광명전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 관촉사 대광명전 내부 탱화

               

    ▲ 관촉사 명부전


   ▲ 관촉사 명부전 내부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주3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은 지옥에서 죽은 자가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지옥왕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


명부전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시왕 뒤편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궁극적으로 이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불교적으로 전개된 법당이다. 명부의 시왕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신중신앙(神衆信仰)주4에 속해 있었지만, 나중에 시왕이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인 명부 심판관의 성격이 다시 강조됨에 따라 독립된 것이 명부전이다.


명부전은 일반적으로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 편에 위치하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傳燈寺)의 명부전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禪雲寺)의 명부전을 들 수 있다.


                   ▲ 관촉사 삼성각


                   ▲ 관촉사 삼성각             


     ▲ 관촉사 삼성각 내부 탱화/사진=충청메시지


 삼성각(三聖閣)은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을 모두 한곳에 모신 전각을 지칭한다. 따라서 우리의 고유 신앙인 산신과 도교의 칠성신앙이 모두 불교에 수용되었음을 표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생명, 복, 재산의 증식 등 현세 이익적인 면이 모두 결합된 현상을 보여 주는 전각이라고 전한다.


    ▲ 관촉사 요사채


      ▲ 관촉사 삼성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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