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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32]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호국종찰 논산 개태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2-07 17:08:39
  • 수정 2024-04-02 04: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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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로 호국종찰이다. 이 아미타삼존석불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태사에는 현존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고려시대, 보물), 개태사 철확(충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 오층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대웅전, 삼성각, 신종루, 왕건 어진전, 요사채 등이 자리해 있다.


     ▲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고려시대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論山 開泰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은 보물 제219호,로 1963년 지정 됐고,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 소재해 있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아미타삼존석불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 신종루  

                 ▲ 동방 지국천왕     

                ▲ 북방 다문천왕

                  ▲  남방 증장천왕

                   ▲ 서방 광복천왕

                   ▲ 신종루

                    ▲ 신종루           

                 ▲ 신종루

개태사지 극락대보전 

       ▲ 극락대보전

        ▲ 극락대보전

                    ▲ 극락대보전 편액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중앙의 본존불은 신체가 원동형으로 처리되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민머리는 소발에 정수리가 큼직하며,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하고 큰 눈에 비해 코와 입은 적은 편이다.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보물 제219호,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손 모양은 중생을 보호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둔다는 시무외인 이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뚜렷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고려시대, 보물 제219호, 1963년 지정)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충남도 논산시 연산면 계백로 2614-11에 소재하고 있다.

 

                  ▲ 극락대보전 내부 탱화

                ▲ 극락대보전 내부 탱화

       ▲ 극락대보전 내부 탱화

                    ▲ 대웅보전

                    ▲ 대웅보전 

                ▲ 대웅보전

         ▲ 대웅보전 삼본불


개태사 대웅보전에는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 내부

                 ▲ 대웅보전 내부 탱화

                 ▲ 삼성각 

                ▲ 삼성각 

                 ▲ 삼성각 내부 탱화

                 ▲ 개태사철확 (開泰寺鐵鑊)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1973년지정)

         ▲ 개태사철확 (開泰寺鐵鑊),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1973년 지정)

                  ▲ 개태사철확 (開泰寺鐵鑊),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1973년 지정)

                 ▲ 개태사철확 (開泰寺鐵鑊), (충남 민속문화재 제1호,1973년 지정)


개태사 철확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사찰로서 개태사를 세웠을 때 부엌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무쇠솥이다. 

 

고려 후기에 개태사가 폐허가 되는 바람에 벌판에 방치되었는데 1887년(고종 24) 대홍수로 약 4km 정도 하류로 떠내려가면서 일제 때 경성박람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 후로 마을에 흉년이 들자 연산 사람들이 총독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솥을 찾기 위해 노력해 마침내 찾아와 연산공원에 전시하다가 198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솥은 가뭄 때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내리는가 하면, 수해를 막기도 하고 풍년이 들게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솥은 직경 289cm, 높이 96cm, 둘레 910cm로 테두리 없는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이다. 두께는 약 3cm이고, 밑바닥의 직경은 약 90cm로 둥근 굽이 있어 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만들어졌다. ‘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지도서(輿地圖書)’ 는 장을 끓이던 솥이라는 기록이 있고, 1944년에는 고철로 쓰기 위해 부수려고 하자 갑자기 천둥 벼락이 쳐서 그대로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개태사 오층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개태사 오층석탑은 아랫부분과 5층의 지붕돌 윗부분이 사라져 아랫부분인 기단부와 윗부분인 보주 등을 복원했다. 지붕돌은 4단의 층급 받침과 처마로 꾸몄는데 네 귀의 처마가 아래로 내려오다가 위로 솟아오르는 반전이 무척아름답다. 탑의 윗부분에는 보주만 올려 좋은 상태이지만 탑 앞에 있는 앙련도 탑의 윗부분 석재로 보인다. 이 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 개태사 오층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 개태사 오층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 개태사 오층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 보주란 탑의 가장 꼭대기 부분의 구슬 모양을 한 석재이다.

#층급받침이란 탑의 지붕돌 밑에 층이 져있는 받침부분이다.

# 앙련이란 연꽃이 하늘을 향해 피여있는 모양을 한 석재이다. 

 

       ▲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

                   ▲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

                  ▲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 어진전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완성한 후 창건한 호국종찰이다. 936년 태조 19년 황산(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왕검은 통일의 대업은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명하고 개태사를 창건했다.

 

사찰이 완공 되자 왕건은 친히 소문을 짓고 성대하게 낙성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왕건이 손수지은 소문에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령이 도와주심에 수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새 연궁(사찰)을 건립했는데 산 이름을 천호라 하고 사찰 이름을 개태사라 했다’고 개태사 창건 동기와 배경을 밝혔다. 개태사에는 왕건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어 진전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기일마다 제를 올렸다고 한다. 

 

왕건의 옷 한 벌과 옥대가 보관 되어 있었으며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에 나아가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실제 공민왕은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가부의 점을 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왕건 이후 개태사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왕건의 관심이 멀어지고 우왕 때에는 왜구가 침입, 방화 약탈을 일삼아 사찰의 살림이 어려워진데다가 조선 초 숭유억불 책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조선 세종 때 불교 진흥책으로 잠깐의 중흥의 기틀을 다지는 듯 했으나 그 뒤 페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서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풍전등화같은 쟁송을 겪고 2008년 명실상부한 대한불교조계종 호국종찰 개태사로서 변모를 일신하여 2013년 3월 15일 어진전을 신축 완공하여 태조 왕건 어진전을 모시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개태사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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