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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33] 효행 근본도량 ‘화산 용주사[龍珠寺](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10 19:56:46
  • 수정 2024-04-02 04: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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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됐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됐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다.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10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뤄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 천불전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19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했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했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고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됐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했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해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다.


# 지장전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해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면서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이밖에 판관(判官).녹사(錄事), 그리고 입구에 장군(將軍) 등을 모시게 된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육도(六道)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면서 악도에서 헤매거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에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이르기도 한다. 이 지장보살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고,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용주사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건물의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架構) 형식을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 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이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하게 된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해 움츠린 듯한 인상을 준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좌우에는 명부시왕 10구와 판관 4구, 사자(使者) 2구,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다.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해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시왕은 저승의 십대왕을 지칭하는데 중생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죄를 이들 앞에서 심판받게 된다. 모두 관을 쓰고 홀(忽)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시왕의 명칭은 제 1진광대왕(秦廣大王),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4왕 오관대왕(五官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7 태산대왕(泰山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五都轉輪大王)이다.


내부 입구 양옆에 있는 인왕상은 얼굴이 몸전체의 3분의 1에 가깝지만 오히려 다부지면서도 당찬 모습이다. 이처럼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시왕과 판관의 모습, 그리고 노려보는 듯한 인왕의 형상은 그 누구라도 압도할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지장보살상의 뒤편에 봉안되어있는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이 두 보처를 중심으로 명부시왕.사자.판관.장군.사천왕.천녀를 도설 했다.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49일까지 일곱 번의 심판을 받고, 백일(白日).소상(小祥).대상(大祥) 때까지 각각 한 차례씩 모두 합쳐 10번을 10명의 대왕에게 생전의 죄업을 고백한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살아 생전 비록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열 번의 기회를 통해 가능한 한 구제 받도록 하는 자비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한 후에야 깨우침을 이루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력은 결국 저승의 세계가 아닌 이승의 세계에서 선근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 범종각 



범종은 사원건물에서 쓰는 종을 가리킨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신묘해 예불의식 등에 쓰이게 됐는데 범종의 소리는 중생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한다. 이처럼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난다고 해 종소리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과 마주 보고 있는 범종각이 있다.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했다. 이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고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했다. 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했는데 종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했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해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도렸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 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했고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준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한다.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명문의 내용은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했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했다. 불기 2950년 7월 주지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종의 크기는 총높이 144㎝, 입지름 87㎝, 두께 5.8㎝ 상대너비 11㎝, 하대너비 12㎝, 당좌 지금 17㎝이며, 900여 년전의 이른 새벽, 막 동터오는 화산(花山)에 울려 퍼졌을 그 우렁차고 은은한 소리는 아마도 무명에 헤매이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일깨웠을 것'이라고 쓰여있다.  


# 법고각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고 보통 북이라고 한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해 소리를 낸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북은 조석예불에 쓰이므로 대개 사물과 함께 보관되나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법고각과 범종각이 마주보고 서있다. 이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옥중생을 위한 범종, 축생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천보루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조류를 위한 만수리실의 운판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중생을 지혜의 세계로 인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용주사에는 늘 각종 새가 끊이지 않고 날아든다.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 시방칠등각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한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설잠(雪岑)스님이었고, 전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순(雪順)스님 등이 제작 봉안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이 걸려있었는데 글귀는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으로 아담한 규모이고 문은 띠살문이다. 건물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했고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있다.



가로 270㎝, 세로 150㎝로 1935년에 제작됐다. 화면 중앙에 치성광여래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했고, 좌우보처로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시립했다. 상단 좌우에는 칠여래가 있고, 하단 좌우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있다.


원래 칠성신은 중국의 도교신앙에서 형성된 후 우리나라에 유입되어서는 여러 신중(神衆)의 하나로 보고 신중탱화 속에서만 묘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신앙형태를 지니게 됐고, 그에 따라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별개의 칠성탱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칠성의 주불(主佛)인 치성광여래는 가람수호의 기능과 함께 약사여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기원하거나, 또는 자식의 수명을 비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받고 있다.


용주사의 칠성탱화는 도석의궤에 충실히 따라 조성한 탱화로 그 신앙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칠성탱화의 왼쪽에 위치하는데 가로 120㎝, 세로 130㎝로 1942년 작이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련없는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있어 가람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산신탱화는 우화적으로 표현한 호랑이와 수염을 기른 노인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용주사의 산신탱화에도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중앙에 노인과 호랑이가 보인다. 노인 오른쪽에는 등에 술병을 메고 오른 손에 과일바구니를 든 아낙이 있고 노인의 뒤에는 부채질하는 소년이 시립해 있다. 전체적으로 산속에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한가로운 모습이다.


칠성탱화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가로 120㎝, 세로 130㎝의 1942년 작이다. 독성은 독수선정(獨修禪定)해 도를 깨달은 성인으로서 독성각에는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봉안하는 것이 통례이다.


독성은 원래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석가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 머무르다가 말세중생의 복덕을 위해 출현했다고 한다. 따라서 독성탱화는 나무와 산, 즉 천태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錫杖)을 짚고 앉아 있거나 편안한 유희좌(遊戱坐.)를 취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동자가 차를 달이는 모습을 하거나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이 독성신앙에 특유의 단군신앙을 가미시켜 독특한 독성신앙이 형성되기도 했다. 용주사의 독성탱화는 나무와 산과 꽃, 그리고 새가 어우러진 천태산을 묘사하고 유희좌를 취한 나반존자와 차를 끓이는 동자를 묘사한다.


# 호성전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했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됐다. 현재 2020년 8월 21일 오전 1시에 전기 누전으로 인해 안타깝게 전소됐고 복원을 중비 중이다. 모셔져있던 만년위패의 임시 봉안처는 관음전이다.


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 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위패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의 복제품이고, 원본은 효행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산진-박광준 기자, 문화재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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