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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75]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집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2-21 10:28:42
  • 수정 2024-04-10 23: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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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김옥균 집터는 3호선 안국역 1번출구 풍문여고 좌측길 정독도서관 입구 오른쪽 화단내에 있다. 표석문구는 조선말 개화파의 지도자인 고균(古均) 김옥균(金玉均)이 거처하며 갑신정변을 논의하던 집 터(종로구 화동 260번지)라고 적혀 있다. 


김옥균은 조선후기 정치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김옥균은 박규수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외척세력이 득세하자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충의계(忠義契)라는 개화파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충의계에는 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이 가담했다.


김옥균은 신사유람단, 제2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건너가기도 했다. 이때 김옥균은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치욕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개혁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김옥균은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명성황후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와 청나라 세력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청국과 프랑스가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개화당에 접근하자, 김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개입을 막는데 이용하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신축한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해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4년 3월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정부에서 보낸 홍종우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살해됐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최근 '한국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 


그는 처음에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청나라와 결탁한 명성황후 세도정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해 변혁을 시도했으나,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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