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04] 김원봉-이성우 등과 함께 의열단 조직한 '곽재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3-03 18:18:16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곽재기, 1893 ~1952, 독립장 (1963)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야 부절(不絶)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의열단 선언’(조선혁명 선언) 중에서 (1923. 1) -


# 중국 길림성으로 망명, 의열투쟁으로 노선 전환


곽재기(郭在驥, 1893.2.7 ~ 1952.1.10) 선생은 1893년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 상봉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字)는 곽경(郭敬), 활동 중에 사용한 이름으로는 김광삼, 김재만 등이 있다. 한말 서울에 유학하여 선생은 경신학교를 다녔다. 이때 선생은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였고, 이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대동청년당은 신채호 등의 지도로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는데, 선생은 1909년부터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다. 이후 선생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민족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때 선생이 밝힌 망명 시기와 동기는 다음과 같다. “재작년(1919) 7월경에 중국 길림성으로 갔는데, 갈 때의 목적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조선 내지에 되도록 폭탄을 다수 수입할 일과, 둘째는 해외의 조선 독립운동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간 것”이다. 즉, 3.1운동 중에 중국 길림성으로 망명하였고, 그 목적은 국외 독립운동 상황을 시찰하고 폭탄을 수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왜 폭탄을 수입하고자 하였을까. 선생의 다음 말이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재작년 3월(1919년 3.1운동) 이래로 조선 독립운동을 입과 붓으로 구할 대로 구하고 원할 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음으로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하고자 하였는데, 우리는 군함도 없고 대포도 없으므로 폭탄과 육혈포를 구할 수밖에 없다”


곽재기 선생 사진즉,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족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독립을 청원하기도 하고, 또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갈구하기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를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한 일이 없기 때문으로 보았다. 무기를 이용한 혈전(血戰), 즉 의열투쟁을 벌이지 못한 때문으로 인식한 것이다.


# 김원봉, 이성우 등과 함께 의열단 조직


만주 길림으로 망명한 선생은 이곳에서 김원봉을 만나 서로 의기 투합하여 의열투쟁 단체로 의열단을 조직했다. 김원봉은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한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은 의열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암살, 파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민중혁명을 촉발함으로써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은 1919년 11월 선생을 비롯하여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강세우,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등의 동지들과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이들이 조직의 명칭을 의열단이라고 한 것은,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하기로 함”이라고 하는 강령 제1조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따다가 의열단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정의를 위해 맹렬히 투쟁하자는 의미였다. 나아가 김원봉을 비롯한 선생과 동지들은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열단 공약 10조’를 결의하였다.


1.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여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에서나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부르면 반드시 응함

8. 피사(避死)치 아니하며 단의에 진(盡)함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를 배반하는 자는 처단하여 죽임


선생의 의거 계획과 검거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이 같은 공약을 결정하여 동지적 결합과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이들은 김원봉을 의열단의 의백, 즉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아울러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은, 1) 조선 총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적(賣國賊) 5) 친일파 거두 7) 적탐(敵探, 적의 밀정) 8) 반민족적 토호 열신(土豪 劣紳, 악덕 지주) 등을 의열단의 ‘7가살(七可殺)’로 규정함으로써 구체적인 암살대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 일제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았다.


#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계획 중 검거


타격 대상을 확정한 의열단은 곧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 후 대대적인 암살, 파괴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해 갔다. 이것이 바로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활동이었고, 여기에 앞장선 것이 바로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과 이성우였다. 우선 김원봉과 이성우는 폭탄과 총기 등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이종암이 망명할 때 가져온 자금의 일부를 가지고 1919년 11월 상해로 갔다. 선생도 이들을 뒤 따라 그 달 중순경 상해로 가서 김대지의 집에 묵으며 무기 구입 활동에 나섰다. 그 결과 선생은 1920년 3월경 중국인에게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재료와 약품을 샀다. 그런 다음 선생은 이것을 임시정부 외무차장인 장건상의 소개로 알게 된 영국인 보일에게 부탁하여 안동현으로 운반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발각을 염려하여 궤 속에 넣고 그 위에 책을 넣어 책 궤와 같이, 또는 수입하는 수수 가마니 속에 넣어 경남 밀양에서 활동하던 동지 김병환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곽재기 판결문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생이 국내에 전달한 것은 폭탄 13개를 만들만한 탄피와 약품, 그리고 그 부속품, 미국에서 만든 권총 두 자루, 탄환 1백발이었다. 선생은 이를 사용하여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 파괴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5월 13일경 중국 안동을 거쳐 경성으로 왔다. 경성으로 온 뒤 선생은 인사동에 유숙하며 여러 동지들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실행을 상의하다가 6월 16일 일경에게 체포되게 된다.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의 재판 과정을 보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시종일관 흰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항상 벙글벙글 웃으며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선생의 굳은 의지와 혁명가다운 배포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선생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지인 이성우와 함께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8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인 1930년 선생은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 상해,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그러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같은 해 1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부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