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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솔거미술관과 교류전 ‘현지우현’ 열리다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3-06 14: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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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솔거미술관과 공동기획 교류전 ‘현지우현’이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에서 열렸다. 이곳은 화가의 꿈이 시작된 이화백의 생가터가 있는 곳으로 백월산의 자락에 위치해 앞으로는 용봉산이 바라다보이며 그의 예술혼이 함께하는 곳이며 연밭 등이 자리해 있다.


 ▲ 이응노의 생가터


이응노(1904~1989) 화백의 생가터는 화가의 꿈이 시작된 곳으로 희망과 열정으로 꿈을 키우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간자리이며, 평화통일과 인류화해의 염원 그의 예술혼이 함께하는 곳이다.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자연과 어우러진 미술관에서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늘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응노 예술세계에 한층 깊고 풍성하게 다가가도록 상설전시와 함께 해마다 다양한 기획전시를 개최한다.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이응노의 문인화 시기(1924~1935)는 처음 전통 서화에 입문한다. 초기 수업과정에서 시서화에 깃든사의 라는 개념을 터득했고 이것은 그의 평생에 예술의 뿌리가 됐다. 대나무를 비롯해 이 시기에 습득한 전통회화의 여러 주제를 유럽으로 간 뒤에 추상작업에 매진하면서도 꾸준히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다시 해석하여 끊임없이 변주한다. 


이 화백의 풍경화 시기(1935~1945)에는 일본으로 가서 서양화와 일분화를 배운 뒤 실제 풍경을 묘사하는 ‘신남화'를 주로 그렸다. 신남화는 일본 화가들이 일본 남화와 서양화의 방법을 섞어 고안해낸 풍경화 양식이다.


취필화 (이응노, 한지에 수묵담채, 135*34cm, 1956년국화 (이응노, 한지에 수묵 121.5*32cm, 1920년 후반)세상 풍경을 사생했다. 전통의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의 풍경과 삶을 발견해서 기록하고 성찰하는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응노 화백의 반추상 인물화 시기(1945~1958)에는 해방의 기쁨과 전생의 상처속에서 시도한다. 해방의 이후에 사생의 원리는 유지하되, 풍경, 길거리 등 현자의 모습을 쾌활한 붓놀림을 써서 표현 한다. 1950년 중반에 들어서 작품경향을 스스로 반추상이라며, 사생을 약화시키고 ‘지적의도’를 암시한다고 말했다. 대상을 그리면서도 화가의 흥취를 살려 그려서 어둠침침한 50년대에 생동감 넘치는 쾌활하고 율동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반추상 (이응노, 한지에 수묵담채,  49*64cm, 1957년), 글씨등 (이응노, 한지에 수묵, 51.7*66cm, 연도미상)

이 화백의 구성연작 시기(1960~1970)는 파리 정착 초기 3~4년간은 종이를 붙이는 ‘파피에콜레’ 기법 또는 수묵으로 낡은 돌 표면을 연상시키는 추상화 ‘사의적 추상’을 그려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70년에는 한자 한글 또는 세계 곳곳에 옛 문자 형상을 재구성한  작품 ‘서예적 추상’을 제작했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구성’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 선의 움직임과 문자의 형태, 여백의 관계 등 자신이 추상 예술의 근원은 서예에 있다고 강조했다. 1960~70년대에는 훗날 ‘군상’의 기초 형식이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대나무1 (이응노, 한지에 수묵, 128.2*33.8cm, 1969년), 풍경 (이응노, 한지에 수묵, 130*32cm, 1957년대)

이 화백의 옥중작(1967~1969)은 동백림 사간에 얽혀 이응노 화백이 2년여 동안 교도소에 수감됐던 시기이다. 그는 교도소 생활이 삶과 예술세계를 새로이 깨우치는 학교였다고 말했다. 비좁고 밀폐된 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간장, 휴지, 밥풀 같은 것으로 빚어 만든 작품들이나 출소 직후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그린 너럭바위 암각화가 있다. 



▲ 수덕여관과 암각화 2점,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도기념물 

제 103호)


수덕여관 암각화는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에 소재해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 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1945~1953)에 머물면서 너럭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다. 


둘레17m, 높이 85m, 또하는는 둘레 7.6m, 높이 75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했다. 글자 같기고 하고 사람 모양같기고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수덕여관 암각화 (둘레17m, 높이 85m), (사진=윤여금 기자)


 ▲ 수덕여관 암각화 (둘레 7.6m, 높이 75m), (사진=윤여금 기자)


 ▲ 암각화(탁본), (이응노, 한지에 먹, 220*93m, 연도미상)


이응노 화백은 무엇을 그렸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제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불밝힘굴 (김대성, 지본수묵, 221*204.5cm, 2006년), 구성 (이응노, 캔버스에 칼라, 종이콜라주 231*136.5cm, 1976년 11월 5일)

이 화백의 군상시기 1980년대에는 말년에 많은 사람을 그리고 만들고 새겼다. 화폭안의 사람들은 서 있거나 뛰거나  걷거나 춤을 춘다. 모여 행진하기도 한다. 수감생활 이후에는 사랑, 평화, 화해를 꿈꾸며 그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을 빚고 사람을 새긴 것이다. 


생음4 (박대성, 지본수묵, 101.5*194.5cm, 2006년), 생음5 (박대성, 지본수묵, 101.5*194.5cm,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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