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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4] 창경궁 풍기대 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5 21:53:25
  • 수정 2024-04-15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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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기대-관천대-성종태실.태실비-양부일구

[박광준 기자] # 풍기대 


풍기대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추정하는 깃발을 세운 대이다.


이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높이 228㎝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이다. 8각 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고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로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됐으리라 생각된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처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풍기와 풍기대에 대해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형 기둥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을 뚫었다. 깃대 길이는 확실치 않고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



세종 때 이후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하고 강과 개천의 수량을 재는 등 관측기술이 발달했는데 풍기에 의한 바람 측정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18세기까지도 실시됐음을 알 수 있고 이 풍기대도 18세기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궐 안 그림인 동궐도(東闕圖)에도 풍기대 위에 길게 나부끼는 풍기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크기는 아랫단의 높이가 80.8㎝, 위 8각 기둥의 높이가 143.5㎝로 전체 높이가 224.3㎝이다. 경복궁 풍기대는 창경궁 풍기대와 함께 조선시대 바람을 측정했다는 실증적 자료로서 기상관측의 선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관천대 



서울에는 현재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가 있다. 하나는 창경궁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있는 것이다. 두 관천대는 구조나 크기, 제작 방법이 거의 같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 높이 3m, 가로 2.9,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다.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했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고,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 창경궁 성종태실.태실비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의 동북쪽 구릉지 숲속에 있다. 성종태실은 조선 성종(成宗)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성종의 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으나, 일제가 1930년 5월 전국에 산재한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강제로 이전하면서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태실은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전됐다. 




성종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石鐘) 모양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고, 상륜(相輪)은 보주(寶珠)로 장식했다. 태실비는 태실의 동쪽에 있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의 머릿돌을 장식하였다.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를 다시 세우게 된 이력이 새겨져 있다.


# 앙부일구(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고,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됐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고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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