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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6] 구중궁궐의 삶, 그 희로애락을 기억하다(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3-19 15:26:44
  • 수정 2024-04-27 0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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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실 여성의 친숙한 공간-내전(1)/통명전-양화당

[박광준 기자]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의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20세에 요절,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예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인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통명전-양화당 전경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환경이 아름답다. 희빈 장시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현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에서 순조의 돌잔치를 열었다. 특히 집복헌의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책례 등이 모두 이루어져, 순조와 그 인연이 매우 깊다. 창경궁 내전은 이처럼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희로애락이 깃든 이야기를 풍부히 전해진다.<편집자주>


# 통명전





창경궁 내전 중 왕비의 정침으로, 경춘전의 서북쪽에 있다. ‘궁궐지’에는 이 전각에서 선조 8년(1575)에 인순왕후가 승하했고 정조 14년(1790)에 불타 순종 33년(1833)에 복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창경궁에 남아 있는 내전 중 유일하게 월대가 있는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끝이 날카로운 수서 2개를 둔 이익공으로 재주두가 있고 기둥 위에 주두와 초각된 첨차를 두어 주심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현재 바닥이 모두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나 ‘동궐도형’과 '궁궐지'에 의하면 중앙 정면 3간 측면 2간, 총 6간이 대청마루이고 좌우로 정면 1간 측면 2간이 온돌방이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인데 특히 용마루가 없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를 놓았다. 이 통명전의 서쪽에는 못[池]이 조성되어 있는데, 장대석들을 바른층쌓기한 장방형의 못이다. 중앙에 돌다리를 놓고 가장자리에 돌난간을 둘렀다. 이 못의 북쪽에 우물이 있고, 여기에서부터 돌로 만든 물길을 따라 샘물을 못에 끌어들였다. 못 안에는 석함과 식석(飾石)이 하나씩 서 있다.


전경창경궁 내전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통명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덕궁의 대조전, 경복궁의 교태전과 같이 건물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 양화당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으로, 창경궁 통명전에서 생활하던 내명부(內命婦) 수장들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왕실 가족들의 거처 등으로 활용됐다. 전각의 명칭인 양화(養和)는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고,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뜻이고,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어필이다


1483년(성종14) 세조의 비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창경궁을 건립했는데, 양화당도 이때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창경궁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됐으나, 양화당은 소실되지 않았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으로 인해 양화당.통명전.환경전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됐고, 1633년(인조 11)에 복구됐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던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창경궁으로 환궁해 양화당에서 거처했다. 1830년(순조 30) 창경궁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양화당이 소실됐으나, 1833년(순조 33)에 복구됐고, 1878년(고종15)에는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화당은 이왕직박물관의 전시실로 사용되면서 건물의 내부와 외부가 일부 변형됐으나, 현재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 건물의 구조는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기단과 월대를 만들었다. 월대 정면에 1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1개의 계단을 놓았고, 기단의 정면에는 2개의 계단이 설치돼 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익공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했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해 지붕 위를 장식했다. 건물 내부는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의 3칸에는 마루를 깔았고, 전면의 중앙에 있는 2칸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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