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원주, 새로운 변화-더 큰 행복1] 500년 강원도의 수부 '강원감영(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04 21:28:07
  • 수정 2024-04-05 19:05:08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강원감영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에 있는 조선전기 강원감영의 건물터.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면서 정무를 보던 곳으로, 강원감영은 1395년(태조 4) 처음 설치된 후 1895년(고종 32)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될 때까지 500년 동안 유지됐다. 지금 옛 건물로는 문루와 선화당, 청운당만이 남아 있고,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건물터와 연못터 등을 찾아냈다. 원주 강원감영지는 면적 약 9,608.6㎡로, 2002년 3월 9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감영지 내에 있는 포정루(布政樓)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선화당은 2021년 보물로 각각 지정됐다.


강원감영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타 버렸던 것을 1634년(인조 12) 당시의 목사 이배원(李培元)이 다시 짓기 시작해 다음 해 이중길(李重吉) 목사가 완성했다. 그 후 1665년(현종 6)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선화당과 삼문을 건설하기 시작해 1667년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완성했다. 이후 관청 건물로 사용해 오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고 담장이 허물어졌고, 관풍각이 있던 큰 연못도 메워지게 됐다. 원주시와 원성군의 통합 전까지 한때 원주군청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원감영의 관아는 1795년(영조 35)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총 27동에 505칸의 건물이 있었고, 1830년(순조 30)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에는 41동의 건물이 나와 있다. 원주목의 관아인 본관.별창.사창.추월대 등을 제외하면 강원감영의 건물은 37동이다. 그 후 고종 때 관찰사 윤병정이 1874년부터 1875년 사이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했는데, 당시 건물은 모두 43동에 495칸이었다.


문루(門樓)는 방형의 긴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익공 양식에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이다. 문루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궁창판에는 장식이 없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선화당(宣化堂)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문루와 함께 재건했는데, 동헌 등 부속 건물이 있었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정면과 양 측면의 각 1칸씩은 툇간으로 처리했다. 중앙부는 바닥을 올려 마루 널을 깔고, 왼쪽 3칸은 개방되어 있으나 오른쪽 2칸은 띠살창을 달아 방으로 구획하고 있다. 이익공 양식에 2고주 7량집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사면에 기둥들을 세워 1칸의 툇간을 두었고, 기둥 옆에는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대에 변형이 있었다.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짰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발굴 과정에 드러난 기단으로 인해 옛 관청의 위용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화당 옆에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자형 목조 기와집인 청운당이 있으나 후대에 옮겨 지은 건물이다.


옛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고 건물터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 형태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 관아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포정루




조선 태조 4년(1395) 원주에 설치된 강원감영은 강원감사의 집무처로 70여 칸의 규모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부서져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현재는 관찰사 집무처였던 선화당과 정문인 문루만 남아있다. 


문루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강원감영문루’라는 현판이 달려있었으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을 근거로 해 1991년에 ‘포정루’로 고쳐 달았다.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는 팔작지붕이다. 




1층 가운데 칸에는 2짝의 널문을 달았다. 2층은 주위를 난간으로 돌려 사방을 개방하였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감영의 자리에 군청이 들어섰지만 선화당은 그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후 1667년에 다시 지은 선화당은 앞면 7칸.옆면 4칸의 1층 건물로 문루와 같은 팔작지붕인 평범한 관아 건물이다. 대청쪽과 앞면, 오른쪽 등은 특이하게 띠살문으로 처리했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시대 감영의 형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선화당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강원도 감영의 정당(正堂)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공간이다. 특히 강원감영 선화당은 정문인 포정문도 원형으로 남아있어 조선시대 감영의 구성 중 핵심적인 공간인 진입공간의 위계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감영이다.


기록상 1665~1667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강원감영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평면에, 가구는 2고주 7량가이고, 팔작지붕 겹처마에 양성을 했고, 용마루에 용두,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망와를 설치했다.원주 선화당은 평면 구조 등은 다른 지역 감영의 선화당과 계통을 같이 하는 보편성이나, 차별되는 점은 조선후기 남부 6도 감영의 선화당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고, 중수와 개건 및 도시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동일한 위치에 실물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1875년 개건 당시의 건축적 양상을 보여주는 포작과 ‘주삼포’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기록이 있는 점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667년 중건된 이후 현재까지 주요 목조가구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강원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고급 관아건축의 전형으로 감영 정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사례로서, 국가지정유산(보물)으로 지정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 내아




내아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은당’으로,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생겻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운당’은 영조 35년(1759년) 내아에서 관찰사의 노모와 가족들을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하여, 임금의 은덕과 은혜를 기리는 뜻으로 ‘대은당’이라는 편액을 지었다. 


# 책방



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가 각 지역에서 올라온 인구.세금.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보급, 인쇄.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 강원감영 사료관(행각)



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1395, 태조 4-1895, 고종 32)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괂살하던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황묵 정선군수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영 전경 등에 대한 아야기를 볼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은 옛 감영의 건축물 중 행각건물에 해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다음회에 계속(후원 권역):사진-박광준 기자, 강원감영 홈페이지(포정루 권역-현재 보수 공사중)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