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원주, 새로운 변화-더 큰 행복 5]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09 07:54:43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흥법사터에 남아 있고,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고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태조 24년(941) 진공대사 충담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이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흥법사에 머물다가 태조 23년(940)에 입적했다.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을 정도로 진공대사는 당대의 존경받는 고승이자 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다.

 


탑비의 받침 부분인 귀부(龜趺)는 용에 가까운 모습으로,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형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만(卍)’ 자와 연꽃무늬가 있다. 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螭首)의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휘젓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이 당시의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 준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손됐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됐고,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경명왕(신라말, 918)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해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했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했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사진-박광준 기자, 문화재청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