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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새로운 변화-더 큰 행복 6] 황장목의 무단벌목 알리기 위한 표식 '황장금표' 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15 1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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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치악산국립공원은 고봉의 절경을 사시사철 만날 수 있다.


198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치악산은 최고봉인 비로봉(1,288m)을 주봉으로 하고, 능선의 길이는 남쪽의 남대봉(1,182m)에서 북쪽의 비로봉에 이르기까지 24km에 달한다. 치악산에는 구룡 계곡과 부곡 계곡, 구룡소, 세렴 폭포 등 명소가 곳곳에 있고, 골짜기와 계곡을 따라 동서쪽으로 이름난 마을이 많다. 사계절에 따라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구룡사의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이 특히 장관이다. 치악산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구렁이를 비롯해 약 4,026여 종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치악산 전경또한 구룡사와 꿩의 보은 설화를 간직한 상원사, 전쟁유적지인 영원산성과 벌목금지의 상징인 황금장표, 우리나라의 대표적 온대림으로 보존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93호 성황림 등 문화자원이 다양해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단풍과 바위가 아름다운 치악산국립공원은 원주시 도심에서 가깝고, 고속도로망과 철도가 발달해 접근성이 좋다. 편리한 교통으로 하루 탐방이 가능해 탐방객이 점점증가하는 추세이다. 치악산국립공원의 다양한 생물종이 보존될 수 있도록 의식 있는 탐방문화 정착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 황장금표



조선시대 줄기가 곧고 재질이 좋은 튼튼한 소나무를 황장목이라 했다. 황장목은 궁궐이나 관청의 건축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무단벌목을 금했고 그를 알리기 위한 표식이 황장금표였다. 만일 황장금표를 어기고 황장목을 베어 가다 적발되면 관가로 끌려가 곤장 100대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인열왕후 탄생지비(향토문화재)



원주시 개운동 415번지에 위치한 인열왕후 탄생지비는 인열왕후가 탄생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비로, 당초에는 출생지인 원주시 인동에 세워졌는데 6.25 전란으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후 재원지구 청주한씨 종찬회가 뜻을 모아 오석으로 이조 호패식비를 건립했다. 인열왕후는 원주목사 한준겸의 넷째딸로 책봉되어 왕비가 되신 분이다.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인조를 도와 치적을 쌓은 왕비로 1651년에는 휘로 명덕정순이 추상되었고 41세로 일기로 세상을 떠난 왕비의 능은 장릉에 모셔져 있다.


# 정병사와 도깨비 비석 유래


전설에 의하면 궁만이(현 위치)에 살고 있던 전태영씨의 3대조에 정병사가 있었다. 정병사 소년시절 가끔 도깨비가 나타났었는데, 혼자 있을 때만 나타나 소년을 향해 넙죽 절을 하면서 "정병사님 언녕하십니까"했다. 소년은 '자신이 자라서 아마 병사가 되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세 되던 해에 뜻을 세워 금강산으로 입산수도,도사를 만나 자신에게 있었던 도깨비가 말한 것에 대해 그 연유를 물으니, 이 도사 왈 "그대는 반드시 병사가 될 것이나 먼저 목사를 한 후에 병사가 될 걸세. 명신해야 할 것은원주, 새로운 변화-더 큰 행복 5 반드시 몸에 비수를 품고다녀야 하네"하여, 비단 한필과 도사의 비수 한 자루를 바꾸어 그 비수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소년의 무술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청년이 되어 하산 하게 되었는데, 도사가 궁만아에 들려서 서울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도깨비도 장성했는지 장승같은 도깨비가 나타나 역시 절을 하면서 "병사님! 이제 오십니까?" 하면서 이번에는 "저는 김공이 올시다"라고 말을 했다.



집에서 하루를 지낸 후 서울에 들어서니 제주 목사를 구한다는 방이 붙어 있었다. 그 무렵 제주 목사를 부임만 하면 하룻밤을 지내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 일이 발생해 모두 제주 목사가기를 꺼려했었다. 하지만, 청년은 도사의 말을 되새기며 제주 목사를 자청했고, 조정은 그 청을 받아들여 제주 목사로 임명했다. 목사로 부임한 날 관복을 입은 채 밤을 지새웠는데, 자시 지나자 난데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귀신들이 나타나 달려들었다. 우두머리쯤 되는 귀신이 하는 말 "우리는 옛 탐라국 사람이다. 육지서 오는 제주목사관리들은 모조리 죽여 버라겠다. 너는 오늘 죽는 길 외에는 없다"며,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이 때 정목사는 품고 있던 비수를 달려드는 귀신의 우두모리를 쓰러뜨렸고, 남은 졸개들은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환상이 사라졌다. 그 후 제주도에는 평온이 찾아 왔으며, 그 무용담이 조정에 알려져 청년은 병사로 승진 을 했고 말년에 궁만이에 낙향해 "저는 김공이 올씨다"라고 했던 도깨비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선정비(김공선정지비)를 만들게 되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이 비를 도깨비 비라고 전하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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