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궁궐이야기 59] 관덕정 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25 10:33:17
  • 수정 2024-04-27 01:02:51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 관덕정



관덕정은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인조 20년(1642)에 취미정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헌종 5년(1664)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예기’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각초석을 넣고 각주를 세웠으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구조상 특이한 것은 측면에 비해정면이 2배 정도 넓으나 같은 한 칸씩으로 구성되어 정면 중앙에 수장폭 크기의 간주를 세우고 좌우 4분의 1 지점에 각각 대들보를 올려 놓았다. 



대량머리는 외부로 빠져나오지 않고 내부에서 창방 위에 얹혀 있는 상태이고 네 귀의 기둥 위에서만 창방의 뺄목을 익공으로 조각했다. 


정자뒤로는 단풍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전해진다.


@ 정조의 시 '관덕풍림 觀德楓林'


(과녁판이 울릴 때면 화살이 정곡을 맞히는데) 畫鵠鳴時箭中心

(구름과 안개로 장막이 선경 숲을 에워쌌네) 雲霞步障擁仙林

(삼청동(신선이 사는 곳)의 물색은 원래부터 이러하기에) 三淸物色元如許

(즐겨 제군과 함께 취하기를 금치 않노라) 樂與諸君醉不禁



‘궁궐지’에 의하면 '관덕정은 영화당의 동쪽 잠원봉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잠단(蠶壇)이 있는데 바로 성종 3년(1472)에 채상단(採桑壇)을 옛터에 지었다. 공혜왕후 한씨가 항상 잠례를 거행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는 누에 관련 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선인문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곧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이 문은 성종 15년에 초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8년에 재건했고, 철종 8년(1857)에 다시 소실되어 고종 14년(1877)에 복원했다. 


’동궐도‘에 의하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 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의 옛 이름은 서린문이라 하며 동궁의 정문이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이 문으로 출입했다고 전한다.


# 월근문



창경궁 사무소 정면에 있는 이 문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정조 3년(1779)에 건립했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동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기 때문에 월근문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 집춘문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서울 문묘가 마주보이는 곳에 있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았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 서쪽 반교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했다고 한다. 초장은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대이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사잔-박광준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