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203] 경기 연천군의 미복원 서원 '임강서원' 외
  • 이승준
  • 등록 2023-12-19 07:30:44
  • 수정 2023-12-19 08:15:59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 임강서원 


원래 장단군에 속해있었으나 수복지 행정구역 변경으로 연천군에 소속됐다.


고랑포리에서 민통선 통제 초소를 지나 260m 정도가면 우측으로 소로가 나온다 그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으로 완만한 경사면에 있는 임강서원지에 이르게 된다.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고, 서원의 초석이나 석재들은 확인되지 않으며 와편이 산재해 있을 뿐이다.


자료사진

민통선 지역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이다. 임강서원은 인조 때 창건된 鳳岑書院을 모태로 1650년(효종 1)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해 임강서원으로 개칭했다.


이후 1694년(숙종 20)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毁撤됐다. '長湍誌'의 기록에 의하면 사우와 강당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됐다고 전하며 安裕(1243~1306)를 主享으로 하여 李穡(1328~1396)과 金安國(1478~1543), 金正國(1485~1541) 등의 3인을 配享했다고 한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많은 유생을 배출한 서원으로 유명하다.


# 미강서원


사진/(사) 한국서원연합회

사진/(사) 한국서원연합회미강서원은 1691년(숙종 17)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2년 뒤인 1693년(숙종 19)에 ‘미강(湄江)’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미강의 명칭은 지역명인 미산에서 ‘湄’와 미강서원이 있는 지역을 감싸고도는 임진강의 ‘江’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71년(고종 8) 봄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됐다. 당시 사우만 철거되어 위패는 그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설단(設壇)해 향사를 지내왔고, 강당과 재실은 유지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그 동안 남아있던 강당과 재실마저 소실됐고 1970년 다시 설단하고 단비(壇碑)를 세웠다. 현재까지 미강서원은 복원되지 못했으나 매년 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