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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04] 서희 선생의 학덕과 기개 기리고 위해 세운 '설봉서원(雪峯書院)'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07 07: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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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공원 노거수 /옛 설봉서원  터 앞 회화나무 [박광준 기자]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궁궐이나 정승이 난 고택이나 학자들이 뜻을 품었던 서울 등지에서 이 나무를 심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학자수'라고도 불리며 아무 곳에나 함부로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몇 백 년 이상의 회화나무 고목은 궁궐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옛 설봉서원 터 앞 회화나무는 1592년(선조25년) 설봉서원이 이곳으로 이전한 이후 서원 터 앞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77년 설봉서원 제향인물들의 위패를 묻은  커다란 묘를 밀어내고 현충탑을 세울 때도 꿋꿋이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이다. 


현재는 주변의 유허비, 하마비와 함께 이곳이 설봉서원 옛 터임을 알려주는 이천시의 소중한 자산으로 앞으로도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켜야 할 자연유산이다. 


유학의 진흥과 장학을 목적으로 창건된 설봉서원은 조선조 명종 19년(1564), 만죽헌(萬竹軒 정현(鄭礥)이 이천도호부의 부사(府使)로 부임해 유림의 열화 같은 공의(公議)에 따라, 겨레의 스승이면서 하늘이 내린 외교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장위공(章威公) 복천(福川)서희(徐熙)선생의 학덕과 기개를 기리고 배우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기내서원(畿內書院)의 효시였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소요재(逍遙齋) 최숙정(崔淑精)을 추가로 배향했다.



당초 사우(祠宇)는 향현사(鄕賢祠)라 불렸고 서원 터가 고을 하국(下局)인 동시에 안흥지(安興池)와 애련루(愛蓮樓)와 맞물려 면학분위기 조성이 어려운지라 선조 25년(1592) 이른 봄에 이천의 진산이다. 상국(上局)인 설봉산 기슭으로 이전하고 설봉서원은 300 여 년 동안 이천유림들에 의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신주를 사우 뒤편에 매안했다.



1990년 경 부터 서원복원에 대한 논의가 진전돼 서원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2004년 6월 사단법인 설봉서원의 등기를 설정하고, 2005년 12월 이천시의 재정지원으로 현 위치에 건축 기공을 하고, 2006년 12월에 완공해 2007년 4월에 준공식을 가짐으로서 철폐 된지 136여년 만에 복원이 완료됐다.


향사일은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이다. 현재에는 한학과 유학을 비롯한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내용으로 하는 일반인교육(雪峯大學)과 방학을 이용한 학생체험교육, 학교나 기관 또는 단체를 대상으로 한 위탁교육 등을 연중무휴로 진행함으로서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서원이다. 

    


# 서희(徐熙, 942∼998)


고려 전기의 정치가이고 외교가로,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신일(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이어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아들 눌(訥).유걸(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특히 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치면서,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고,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 수 년 간 단절됐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거란군은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한 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했으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동조하자 성종도 찬성했다. 이 때 소손녕도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해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고 여기에 응하게 됐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으로부터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받자,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고 해 단호히 거절하면서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러나 서희는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서희는 알고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 : 곧 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해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하면서 설득했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철병했다. 이로 인해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歸州).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육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왔다. 한편 그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했을 때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해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至尊)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일곱 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다. 그러나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그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함께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시호는 장위(章威)로,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됐다.

 


# 이관의(李寬義, 1409~1491)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성리학을 비롯해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해 각기 일가를 이뤘다. 세종 때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에 임명됐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 많은 유생들이 모여 들었다.

1483년(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했다. 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 후한 상을 내렸고, 이 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했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했으나, 성종은 경기감사에게 명해 미곡을 하사하여 표창의 뜻을 보이게 하라 했다. 문하에 정여창(鄭汝昌), 손순효((孫舜孝), 남효온(南孝溫)등이 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565년 (명종 20)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됐다.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조선시대 문신.학자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해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됐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됐고,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돼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 '잠서언해 蠶書諺解' '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 '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 '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辟瘟方' '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 널리 보급했고 향약을 시행토록 해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됐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고,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했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고,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고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됐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峯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됐다.


# 최숙정(崔淑精, 1433∼148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사숙재(私淑齋), 시호는 청간(淸簡). 우보(雨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흡(承洽)이고, 아버지는 오위사정(五衛司正) 중생(仲生)이고, 어머니는 안선복(安善福)의 딸이다.



1461년(세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발탁됐다. 1464년 문풍 진흥을 위한 본관(本官)으로서 예문관직을 겸비하고 유학을 습업(習業)하게 한 겸예문직의 운영과 함께 겸예문직에 제수되고 사학문(史學門)에 배속됐다.


1466년 문과중시에 발탁되고 연이어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의 혜택을 입었다. 1470년(성종 1) 형조좌랑.경연시독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고, 실록편수가 끝난 뒤 1계(階)가 가자(加資)됐다.


1472년 사헌부지평, 이후 예문관교리.경연시독관.경연시강관 등을 역임하고, 1476년 12월에 찬진(撰進)된 '삼국사절요'의 편찬에 예문관부응교로서 참여했다. 1477년 임금이 문신들을 친히 본 시험에서 연이어 세 번이나 장원을 하고 예문관직제학.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다음 해 찬진된 '동문선'의 편찬에 참여하고, 같은 해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파견됐다.



1479년 “두량(斗量)을 부정하게 사용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가 그 이듬해(성종 11) 홍문관부제학으로 복직돼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金宗直), 강희맹(姜希孟), 대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 등과도 교분이 두터워서 일세의 명현이었다는 평판과 높은 시격(詩格)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1857년(철종 8) 雪峯書院에 제향 됐고, 1968년 경북 고령군 삼현사(三賢祠)에 제향 됐다.


2007년 4월 설봉공원 내에 복설된 설봉서원은 총17억원의 예산으로 2000평의 부지 위에 연면적 110평의 규모로 지어졌다. 사우는 상현사(尙賢祠), 강당은 명교당(明敎堂), 동재는 삼성재(三省齋), 서재는 구사재(九思齋), 관리사는 양사재(養士齋), 외삼문은 앙현문(仰賢門)으로 했다. 그 외에 전사청, 내삼문, 협문, 기적비, 복원비, 홍살문 등을 갖추었다. 설봉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양식인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으로 서원의 대다수가 이 유형에 속한다. 건축의 규모, 구조 및 양식에 있어 조선조 서원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고, 주위의 경관과도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설봉서원은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건립된 초기 서원에 해당하고 이건 된 곳으로부터 1Km정도 떨어진 위치에 복원됐다. 설봉서원의 복원은 이천지역 儒敎文化의 현대적 계승발전과 관련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전통혼례의 시행이나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설봉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문화교육은 ‘유교문화유적’의 바람직한 활용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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