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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52] 영월암/향토유적 제14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11 09:26:05
  • 수정 2024-06-12 21: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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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이천의 전산인 설봉산 주봉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은 이 고장의 대표적인 유서 깊은 고찰이다.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조 36년(1760) 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 이천지와 광무 3년(1899)에 나온 ‘이천군읍지’에는 모두 ‘북악사’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로 ‘영월암’이라 불려오고 있고, 현재는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다.   




영월암 중건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1,300여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해동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 할 만 문헌이나 금석문 등 신빙자료가 없어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내에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보물 재882)과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까지, 그리고 석조, 3층석탑 등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영월암이 창건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인 영조 50년(1774)에 이르러서야 영월 낭규 대사가 사찰의 면모를 일신해 큰 불사를 일으켜 중창했다. 그 뒤 1911년 보은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당시 주지인 유선암 스님이 극락전을 옮겨 세웠고, 1937년에는 조언우 스님이 산신각과 누각인 단하각을 중건했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을 1949년 청암 김명칠 스님이 이천향교 명륜당 앞에 있었던 퇴락된 풍영루 채목으로 옮겨 짓다가 6.25 동란의 발발로 중단된 것을 것을, 1953년 11월 당시의 주지의 김해용 스님이 준공했다. 






현재의 영월암은 대웅전과 부속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3층석탑, 석조광배 및 팔각연화좌대 등의 유물들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981년 주지 송정해 스님이 사계의 고증을 받아 수습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1989년 8월14일 소실된 서편 요사채를 1991년 여름에 법정 강종래 스님이 전통한옥으로 복원해 명실공히 전통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절 앞에 일근 2주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00여년을 헤아리는데, 이는 고려말의 고승 나옹대사가 이 절에 머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신비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지팡이가 자란 은행나무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는 풍수지리에 밝은 고승으로 조선의 수도를 정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라고 한다. 나옹대사가 영월암에 머물던 어느 날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 은행나무(640년)가 서있는 자리에 꽂아놓았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뒤 나웅대사는 절을 떠났고,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지금의 이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매장 문화재가 발견된 곳으로 해단 석부재는 전형적인 나말여초 시기 석탑의 일부로 추정된다.

영월암에서 바라본 이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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