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구 시흥 5동 주민센터 6층 '시흥행궁전시관'에서 바라본 은행나무(18-1, 18-2)
[우성훈 기자]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이다.
조선시대 정조는 효자로 유명했다.
도로에 있는 은행나무(18-1)아버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묻힌 무덤이 풍수지리상으로 좋지 않음을 깨달은 정조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부 화산으로 묘를 옮기고 이를 ‘현륭원顯隆園’ 이라 명했다. 그 때 정조가 한양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길에 하룻밤 머물기 위해
세운 별궁이 ‘시흥행궁’ 이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18-2)행궁의 모습을 현재는 볼 수 없지만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그 터를 지키면서 묵묵히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800년이라는 세월을 깊게 삼키고 있는 은행나무 앞에 서서 정조가 이 곳에 머물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해 본다.
이 곳의 은행나무 세 그루는 수령이 88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18-1, 18-2, 18-3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도로에 있는 은행나무(18-1)가 보호수로 세 그루 중 가장 작다. 높이가 8.5m, 둘레가 6.1m이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18-2)는 높이 14m, 둘레 8.6m로 가장 크다. 골목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높이 10.8m, 둘레 7.3m의(18-3) 은행나무가 나온다.
골목 안쪽에 있는 은행나무(18-3)은행나무가 모여 있는 이 곳은 조선시대 금천현(시흥현)의 동현 관아가 있던 곳이다. 18-1은 은행나무의 옆에는 현령들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 4기가 있고, 18-2의 은행나무 아래에 동현 관아 자리를 알리는 푯돌과 안내판이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 주변은 역사적으로 정조가 한양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길에 하룻밤 머물기 위해 세운 시흥행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사진-우성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