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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역 이야기 14] 새벽을 여는 기적소리 ‘노량진역’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6-13 21:51:02
  • 수정 2024-06-14 01: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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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화륜기의 기적소리는 우레와 같이 천지를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1899년 9월 19일 발행된 독립신문은 시속 20km로 노량진과 인천을 달리던 경인선 열차를 보고 이와 같이 표현했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철도가 개통할 당시 인천역에서 진행된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한 귀빈들을 태우기 위한 열차가 노량진역(영등포 위치의 임시역사)에 도착했다. 



이렇듯 옛 노량진역은 한강철교가 완공되기 전 경인선의 시종착역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1975년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 휘호와 서정주 시인의 시를 새긴 철도시발점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특히 이 철도시발지 기념비와 관련 경인선 철도 시발역에 대한 이견이 이어져왔는데 최근 코레일에서 발행한 철도주요연표에 의하면 개통식 장소를 노량진역에서 인천역으로 정정했다. 오늘날 역사는 1971년에 건축된 것으로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이 운행을 시작, 2005년 여객열차 운행중단으로 광역전철역으로 역할하고 있다.     


# 용산과 노량진을 연결한 한강 최초의 다리, 한강철고



1899년 개통 당시 경인철도는 노량진역에서 인천까지 약 1시간 40문을 걸려 매일 왕복 2회 운영했다고 한다. 쌀 한가마니가 4원 하던 시절, 외국인 전용인 상등석이 1원 50전이었으니 당시 열차는 무척이나 비싼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1900년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노량진역과 서대문역이 연결되는 역사적인 시간이 발생한다. 


철강 1,200t, 벽돌 120만 장, 석재 5만 개가 근대식 토목공사에 의한 최초의 대형 교량이자 한강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는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취득한 J.R Morse에 의해 공사가 시작, 총 5년여 만에 준공됐다. 







당초 J.R Morse는 한강철교 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보도를 함께 만들기로 약속하였으나 이후 경인철도부설권을 넘겨받은 일본이 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보도 없이 철교가 완공되어 1917년 인도교가 새롭게 건설되기도 했다. 




한강철교는 한국철교교통과 근대화의 중요한 상징이지만,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 올랐던 수많은 피란민이 우리 정부에 의해 희생당했던 비극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진-박광준 기자

# 작은 철도박물관과 우리나라 기차 1호


2018년 대한민국 철도사의 시작을 함께한 노량진역에 경인선 최초설계도와 조선철도 여행지도, 증기기관차, 열차 미니모형 등을 볼 수 있는 작은 철도박물관이 꾸며졌다. 


그렇다면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역을 출발했던 열차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천지가 진동할 만큼 큰 기적소리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이 기차의 이름은 ‘모갈 1호’였다. 모길(Mogul)이란 거물, 또는 거인을 뜻하는 이름이었지만 낯선 발음 탓에 사람들은 불을 때서 가는 기차라 하녀 화차, 또는 화륜거라 불렀다. 


사진-박광준 기자

그리고 이후 융희호, 해방을 기념하는 해방자호를 거쳐 통일호와 무궁화호로, 재건호, 새마을호가 등장, 그리고 드디어 2004년 꿈의 시속 300km를 달리는 KTX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싱싱한 수산물이 많아 백로가 즐거운 나루터 


노량진이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예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한 노들나루라 불렀다. 오늘날 물내음나던 뱃길의 흔적은 노량진나루터 표지석(노량진 배수지 시민공원 위치)으로 만 남았지만, 대신 싱싱한 수산물을 바로 먹을 수 있는 수산시장이 위치해 백로뿐만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즐거운 공간이 되었다. 


사진-박광준 기자

노량진 수산시장은 1927년 경상수산(주)으로 서울역 근처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수산물을 산지에서 소비자로 이송하는데 철도교통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차 서울역 인근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장을 도심 외곽으로 이전할 필요성이 높아져, 1971년 한국냉장(주)가 지금의 위치에 도매시장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바로 노량진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픈 청춘이 머물다 가는 곳



1978년 정부는 서울 도심지에 있던 261개의 학원을 부도심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당시 가장 유명했던 대성학원이 노량진으로 이사하면서 노량진역과 노량진 거리는 1980-90년대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IMF 사태로 대학 입시 학원뿐만 아니라 공무원 학원, 자격증 학원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20, 30대 취준생, 공시생들이 모여들었고 노량진역은 어느 순간 아픈 청춘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노량진 거리는 돈 없는 젊은이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컵밥, 떡볶이, 한끼버거 등 거리 노점상이 발달하면서 이 시대 청춘들의 치열한 삶의 공간이 되었다./사진-우성훈, 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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