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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39] 백제역사 충절의 '계백장군 '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4-06-12 17:16:23
  • 수정 2024-06-12 20: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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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계백장군유적지는 충남도지정 기념물 제74호로 1989년에 지정 돼 논산 부적면 충곡로에 위치해 있다. 계백장군은 의자왕 대에 성충, 홍수와 함께 백제 3충신 중 한 명으로 백제역사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660(의자왕 2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도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 백제장군은 결사대 5천 여명을 이끌고 황산벌에 나아가 신라군 5만 여명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백제군은 지형이 험난한 요충지 세 곳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신라군의 공격에 백제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계백장군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유적지 내에는 계백장군 묘소와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가 있고 문화교육공간으로 백제군사박물관과 야외체험장 등이 자리 하고 있다. 


계백장군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홍살문

계백장군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삼문

 계백장군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계백장군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내부

계백장군 유적전승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   계백장군 묘역

이곳 묘역은 백제 말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별에 나아가 신라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를 마친 백제 충신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계백(堦伯?~660)은 백제의 장군으로 벼슬은 달솔(達率,제2품)이며, 백제 성충(成忠), 흥수와  더불어 백제 3충신으로 꼽힌다. 554년 성왕(聖王) 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641년 의자왕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노리고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면서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 되었다. 660년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 왔으며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1당 100의 열세에도 4번을 싸워 이겼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황산벌에서 전사했다.


계백의 충성스런 죽음을 본 백제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백제의 유민들과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오다가 1680년(숙종 6)에 장군의 위폐를 주향으로 모신 충곡서원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내왔다. 


1976년 부적면민들이 '계백장군묘소 복원 추진위원히'를 조직한 후 묘소의 정비를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5월에 지석을 안치하고 봉분 둘레 47.6m, 높이 6.5m로 복묘하여 묘역의 정비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참여한 인원이 272명 이었고, 원근의 성원하는 인사들의 참관인원도 150명 되었다. 그 후 1989년 계백장군 묘역이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고 박물관과 사당 건립 등 유적지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오는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계백장군 유적전승지 (야외 국궁체험장)

 계백장군 유적전승지 (야외 국궁체험장)

 계백장군 유적전승지 (황산루)

계백장군 유적전승지에 능소화가 피어 있다.

계백장군 유적전승지 (백제군사박물관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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