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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53] 와불상이 있고 우담바라 핀 사찰 '청계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13 12:40:38
  • 수정 2024-06-13 13: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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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청계사는 신라말 고려 충렬 왕 때 창건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종의 총 본산으로 한국 불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청계사의 정확한 창건 연도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봉은사의 사적을 기록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내용이 있으나 구체적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사찰 경내에 있는 석등과 부도 일부는 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므로 신라시대의 창건설은 믿을 만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청계사에 관련된 기록은 대체로 고려 후기가 되면서 집중적으로 보인다. 곧 1284년(충렬왕 10) 당대의 세력가였던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막대한 사재를 들여 중창하면서 청계사가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계사의 역사에 있어서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청계사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조인규 및 그의 후손들을 빼놓고 말 할 수는 없다.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했다. 그는 청계사를 중창하면서 사찰 아래쪽에 별당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의왕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문화재자료,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이 비는 고려시대1341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2번지청계사 경 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을 만들게 된 과정을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지은 글을 사당기라고 하며, 이를 비석에 새긴 것을 사당기비라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77cm, 너비 84cm로 찬자는 이곡, 글씨는 왕수성이 썼다. 전체적으로 앞면과 뒷면모두 마모가 심해 글씨를 모두 알아보기 힘들지만 뒷면에 새겨진글자의 일부가선명하게 남아있어 내용의 일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석의 앞면에 비명인 '조정숙공사당기비가 새겨져 있고 비문과 같은 내용이이 비석의 찬자인 이곡의 문집 '가정집'에도 실려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찬자인 이곡이 어떻게 비명과 바문을 짓게 되었는가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조인규의 일대기를 적어 놓았고 마지막 부분에 청계사를 짓게 된 경위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비문으로 인해 조인규와 충렬왕의 관계를 비롯해 당시 고려와 원나라와의 대외관계, 청계사의 창간이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는 이처럼 원찰(願刹)을 지어놓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것이 때로 부정적 측면을 빚기도 했지만 불교 융성의 큰 뒷받침이 된 것도 사실이다.


조인규는 평양 상원(祥原) 지역의 미미한 가문에서 출생했고, 청년 시절 역시 그다지 뛰어난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43세 때 세자의 신분이었던 충렬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다녀오면서부터다. 기록에 의하면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을 뽑는 양성 시험에 합격한 후 상당한 노력으로 몽골어에 정통했다고 한다. 


의왕청계사 사적기비(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1689년(조선 숙종 15년)/이 비석은 1689년(숙종15)에 제작된 청계사의 연혁을 기록한 것으로 1689년 청계사 입구에 세워졌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을 만들었고 그 위에 팔각지붕의 머릿돌을 얹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 176cm, 너비 92cm, 두께 27cm로 찬자는 조운, 글씨는 윤창적에 의해 쓰여졌다. 전체적으로 비교적 글씨가 마모되지 않고 잘 남아 있어 내용을 알아보는데 어렵지 않으며 탁본을 떠 의왕향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청룡산의 청계사는 고려 시중 조정숙공의 별장이라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정숙공은 조인규를 가리키는 말로써 조인규의 사람됨과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조인규와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가 나타나 있으며 청계사를 창건해 왕을 축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에 조인규사당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비문의 끝 부분에 청계사는 1689년(숙종 15)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했다는 사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자 조인규는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공주의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충렬왕이 즉위하니 조인규의 지위는 점차 향상됐고, 원나라 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어 원나라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그는 1292년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 사위인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어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조비(趙妃)를 질투해 일어난 조비무고사건으로 왕이 7개월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조인규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지역에 유배됐다. 



그러다가 6년 후인 1305년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1307년에는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 이에 따라 조인규도 다시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恣議都僉議司事平壞君)에 봉해지면서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다.


말년에 누린 그의 권세는 곧 그의 가문이 튼튼한 세력을 구축해 가는데 밑받침이 됐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조인규가 1284년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청계사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중요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조인규의 정치적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정도로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때였고, 그의 권세가 그대로 사찰 중건에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찰 지원에 관심을 보이고 영당(影堂) 관리를 해왔음을 볼 때, 조인규가 나타내었던 청계사에 대한 열정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결국 청계사가 오늘까지 그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데는 조인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던 물질적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청계사는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으면서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신도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전각으로는 극락보전과 요사를 비롯한 10여 채의 건물이 있고 경내에는 국가보물 제11호인 동종과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목판이 있다. 




봉은본말사지에는 1879년까지의 간략한 연혁이 서술되어 있다. 그 밖에 1689년 건립된 청계사사적비(淸溪寺事蹟碑)와 1881년 작성된 경기좌도광주군청룡산청계사중건기(京畿左道廣州郡靑龍山淸溪寺重建記)를 통해 일부 연혁이 확인된다.


청계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출가자로 경허선사의 선맥을 이은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체취가 경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시대 세종 때 1차 중창, 숙종 때 2차 중창을 거쳐 사격을 유지해 내려오다가 지난 2001년 종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오면서 사격을 일신하고 진입로 불사를 마무리해 대찰의 면모를 갖췄다. 


현재는 성행스님이 주지를 맡아 경허, 만공, 금오, 월산 선사의 부도를 조성하는 등 회주종상스님의 지도아래 민족 문화사적 위상제고를 위해 경허 스님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한국불교의 빛나는 고승 4분의 부도탑 조성을 위해 선종 종찰로서 명실상부한 '한국 선불교 중흥 본찰'로서 거듭나게 되어 호국안민은 물론 그 위업을 길이 계승하고 후손들의 정신교육의 산실로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교육의 산 현장이 되고 있다.



한편, 청계사에서는 최근 2000년 10월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의 상호 횐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 꽃이 피어 세간에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담바라는 경전에 의하면 여래나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 나타나며 3,000년 만에 한번 핀다는 전설 속의 꽃이어서 청계사에 그모습을 나타내자 전국의 불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놀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우담바라가 피면 영화스럽고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해 영서화(榮瑞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계사의 이 우담바라는 높이 1cm의 작은 크기로 모두 21송이가 피었었다.


# 극락보전



경내 가장 뒤쪽 중심에 자리잡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기단부는 최근에 쌓은 것이지만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庚子 三年 三月'이라는 글씨가 확인되어 1900년(광무 4)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극락보전 현판

지붕의 포작은 익공식이고, 처마가 이중으로 된 겹처마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각각 4분합의 세살문이 있다. 전각 외부의 벽화로는 수행자가 도를 깨우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심우도(尋牛圖) 10폭이 채색 없이 수묵화(水墨畵)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 필선이 매우 흐려져 있어 자세히 알아보기 어렵다.


안에는 유리장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후불탱, 그리고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외부 처마 아래에 걸린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은 도서와 관지가 없어 작자와 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글씨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서체의 글씨가 별 다른 꾸밈없이 단정하면서 힘이 있어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느끼게 한다.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전 앞에 걸린 보름달과 같은 부처님 얼굴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옥호에 금빛 찬란산 빛 내어 허공을 비추시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만일 사람이 일념으로 부처님 이름 외운다면

煩刻圓成無量劫(번각원성무량겁) 번뇌 단박에 없어지고 원만성취 이루리


# 지장전



지장전(地藏殿)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편액이 걸려 있지는 않지만 안에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주련의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지장 대성의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나진) 항하의 모래만큼 억겁을 설하여도 다하지 못하여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또 엎드려 절하니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 사람과 하늘 모두에게 한량없는 이로움 주소


# 삼성각



극락보전 왼쪽에 부도가 서 있고 그 뒤로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1993년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지장상은 지장전 금동 지장보살입상과 함께 청계사의 지장신앙을 느낄 수 있는 성보문화재라 할 수 있다.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로 근래에 지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은 근래에 전각을 지으며 함께 쓴 글씨다.


# 극락보전 아미타삼존


아미타삼존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높이 110㎝이고 두 보살상은 높이 107㎝로 모두 조선 후기에 속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한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만, 관음보살상은 양식에서 조금 차이를 나타내면서 조성 연대도 다소 올라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삼존불좌상은 사각형의 평면적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입과 코, 넓은 귀 등을 오려 붙인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머리부분에서도 나발(螺髮)의 모습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다른 불상보다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의 불상 가운데 보기 드문 정제미를 표현한 수작이라고 평가된다.


# 와불




청계사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광장처럼 넓은 대지가 있고 여기에 거대한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자그마한 자갈들을 모아서 조성한 이 와불상은 지금은 청계사의 명물이 되었는데, 1999년 지명 주지가 봉안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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