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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역 이야기 15] 사통팔달 정조의 꿈 '수원역'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14 11:26:09
  • 수정 2024-06-14 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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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수원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보토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당시 조선총 독부는 수원역의 입지를 일컬어 기름진 들판과 시장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한 물산의 집산지이며 시내에는 높은 성벽과 사대문이, 남쪽에는 울창한 팔달산이, 동쪽에는 광고산이, 서남쪽에는 광야가 펼쳐져 있는 사통팔달한 요충지라 평했다. 실제 팔달산은 과거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사통팔달의 형세를 이룬 곳이라 평해 남탑산에서 팔달산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최초의 전통한옥 철도역 탄생




조선 대부분의 간선철도는 대체로 청일, 러일전쟁기의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어 철도와 지역의 연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의 철도는 여객열차의 운행편수와 수송량이 매우 적었다. 1920년 후반 전반적인 경제 불황으로 화물수입 중심이던 철도건설사업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수입처 발굴을 위해 곤광사업에 집중, 유서 깊은 수원 화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1928년 약 585m2(177평) 단층한식 기와집에 팔자지붕을 갖춘 조선 최초 전통한옥역사 수원역이 재탄성 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관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부 계층과 일본인의 몫이었다. 일제는 관광을 통해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전선하기 위한 것이다.  


# 축구장 5배 규모 초대형 환승센터



수원역은 거대한 연기를 내뿜으면서 증기기관차가 남북으로 달리고, 경기도를 동서로 이어진 수려선과 수인선의 협궤열차가 오가던 곳이다. 2003년 2월 민자역사로 거듭 태어난 수원역은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일부 KTX를 포함한 모든 여객열차가 정차할 뿐 아니라 수도권전철 1호선과 분당선이 환승역이며 2017년 축구장의 5배 넓이만 한 수원역 환승센터가 설립되면서 명실공히 수도권 최고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 정조와 실학자들이 그린 이상도시의 꿈


팔달문 전경199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팔단산 아래 축성한 성이다. 역에서 가장 가깝게는약 2.3km 지점에 팔달문이 있고, 이 밖에 화서문, 장암문, 창룡문 등 4개의 성문과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에는 성벽 전체둘레가 8.36km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데, 활차와 거중기, 벽돌 등 당시의 모든 기술을 집약해 2년 6개월  만에 완공을 이룬다. 


화서문수원 화성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인 동시에 정조와 실학자들 이 구상해온 이상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도시의 구현이었다. 실제 대로변에 상가를 조성해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나 정조의 사후 화성이 방치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역사 중심에서 비껴가게 된다. 


# 수려선.수인선의 자취로 남은 급수탑


급수탑/수원역은 1905년 견부선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가 남북으로 달리고, 경기도를 동서로 이어준 수려선과 수인선의 협궤열차가 오가던 곳이다. 또한 수도권 전철과 2010년 KTX개통까지 수원역은 질주하는 철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로서 콘크리트의 급수탑과 빨간 벽돌로 쌓은 급수탑 2기가 준철도기념물로 넘아있다.  1930년 12월 1일,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려선과 1937년 8월 6일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 선이 각각 개통하면서 수원역은 경기 남부 지역 철도 교통의 허브로 한 번 더 성장한다. 일제강점기 쌀과 소금, 목재 등의 수탈을 위해 태어난 사설철도, 그러나 수탈의 상징이던 수인, 수려선은 광복 이후에는 도시화에 소외된 가난한 서민들의 발로 변화한다. 


1970년대 수원역 급수탑

뒤뚱거리며 달리던 2량짜리 까만 동차는 느리지만 그만큼 저렴했기에 서민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철도였다. 결국 선로 노후와 경제성 약화로 각각 1995년, 1972년 폐선됐지만 최근 2016년 송도-인천 구간 수인선이 일부 복원되면서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 수원시  세류동의 크고 작은 두 개의 급수탑이 당시 수원역을 지나던 수인선, 수려선의 흔적으로 남아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농업교육기관의 요람, 수원고등농림학교


수원농림학교는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수원역 인근 민유지를 매입, 개교한 농림학교가 그 효시이다. 당시 수원역 주변에는 수원군청, 경찰서, 우편국, 권업모법장 등 관공서를 비롯해 일본인들의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농림학교로 바뀌게 되면서 이 권업모범장에 부속 설치되었다. 


수원농림학교 터 안내판 이후 수원농림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농업교육기관들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 곳이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전신이다. 당시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가 극심해 조선인 학생들은 차별철폐와 권익 신장을 위해 여러 차례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이후 한글연구회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학교 비밀 결사로 발전해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에 힘썼다. 


최근에는 이 서울 농대가 서울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경기상상캠퍼스로 새롭게 조성되었고 옛 건물이 가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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