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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지와 용두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방화수류정'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6-14 21:35:11
  • 수정 2024-06-18 03: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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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 전경 

[박광준 기자]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정자를 쓰였다. 


1920년 누각이 사라진 북수문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 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 북암문


북암문 앞면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북암문 뒷면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월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 평지북성


평지북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가운데 평지로 이루어진 북쪽 성곽이다. 북문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북동적대부터 북수문(홍화문)까지, 서쪽은 북서적대부터 서북공심돈까지 모두 10개 사설물이 있다. 이 일대는 지형이 평탄한 편이어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다른 곳보다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상동성과 평지북성의 경계선은 화홍문의 동쪽 끝이다. 이 지점부터 산을 향해 오르막이다장안문 주변은 성벽이 약간 바깥으로 나온 편이다. 이는 처음에 화성의 성벽위치를 결정할 때 민가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피하고, 남문과 북문의 거리를 확보하라는 정조의 뜻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북성 구간에서 눈 여겨 볼 곳은 성문 양족에 적대를 세운 장안문, 수원천과 누각이 조화를 이룬 화홍문, 빼어난 군사 시설인 서북공심돈을 들 수 있다.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1906년 경 찍은 사진/왼쪽에는 육지송과 화홍문, 오른쪽에는 방화수류정, 가운데 뒤에는 북동포루가 보인다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현재의 방화수류전 모습방화수류정의 포혈(대포 구멍)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 (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ㅈ;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 동북포루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돠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전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건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 용연


일제강점기 용연용연은 화성의 북쪽 성밖에 있는 연못이다. 금강산 구룡연을 비롯해서 전국의 이름난 명소에 용연이라는 명칭이 두루 쓰였고 갖가지 전설이 있다. 


화성의 용연은 용머리처럼 생긴 용두 바위에서 유래했다. 용두 바위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이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용연’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이 반달처럼 생겼고, 용두 바위는 물고기를 잡는 조대로 쓸 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간다. 


출수구에는 용이 되기 전 단계의 짐승인 이무기 상을 새겼는데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용연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인 ’용지대월‘은 화성에서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꼽힌다. 


# 용지와 용두암 이야기


정조 대왕께서 화성을 쌓으면서 방화 수류정을 짓기 전 이곳은 수원천이 휘돌아 나가는 제법 깊은 연못이었다. 이곳에는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며 천 년 동안 수양을 쌓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용은 매일 연못으로 놀러나오는 귀여운 한 소녀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여러번 그 소녀를 도와주었지만 소녀는 용의 존재를 몰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소녀는 아리따운 여인으로 성장하고 용도 하늘로 오를 날이 가까워졌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느덧 용은 소녀, 아니 성숙해진 여인을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용과 여인은 서로 다른 존재라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고, 거기에다 여인은 혼인을 앞두고 있어, 용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 상제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옥황 상제는 인간이 되어 연인과 살든지 여인을 잊고 승천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용은 승천하여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용이 되는게 소녀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승천을 선택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하루만 인간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옥황 상제는 소원을 들어주며 소녀를 만나게 해주었으나 헤어진 후 다시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봐선 안된다고 하였다. 소녀와 만난 후 승천하기를 기다리던 용에게 드디어 그 날이 다가 왔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서쪽의 출수구를 통해 수원천으로 흘러 나간다. 용은 충만한 하늘의 기운을 온몸에 받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 우연의 일치인지, 그 순간 여인이 용이 승천하는 하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용은 가슴과 온몸이 굳어지며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 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굳어진 용의 몸은 용연 옆으로 떨어져 부르게 되었고 용이 살던 연못은 용지, 또는 용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사진-박광준 기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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