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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71]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09 16:46:43
  • 수정 2024-04-02 05: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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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야외전시를 살펴보자. 야외 전시 부분은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 개소시기부터 1987년 서울구치소로 사용되기까지 일제강점기의 서대문형무소의 확장과 항일독립운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통사적 전시 공간이다.


서대문형무소 초기 사형장터/이곳은 1908년 10월 서대문형무소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었을때 최초로 설치된 사형장이 있던 자리이다. 초기 사형장은 교수대가 2개 설치됐고 지하에 시신수습실이 성치됐다. 지금의 연못은 그 지하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 이강년.허위.이인영 등 항일 의병장과 이재명 의사.강우규 의사 등 70여 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형 당했다. 1921년 전후 옥사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사형장 위치로 이전했다./사진-박광준 기자

사각 연못/일제강점기에 나전칠기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1979년에 빨래터로 사용하려고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서대문형무소 뒤편 안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연못으로 들어와 1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 /사진-박광준 기자

이 추모비(작품명;민족의 혼 그릇, 임승오 2010년작)은 자유와 평화, 정의를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대한민국이라는 큰 그릇 안에 순국선열의 이름을 하아씩 새겨 그들의 민족정신과 신념이 발전된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표현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순국지사 165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비(작품명;민족의 혼 그릇, 임승오 2010년작)/사진-박광준 기자 

사형장은 사형을 집행했던 곳이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1916년 경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돼 있다. 1층 안에는 교수형을 집행키 위해 여닫히는 마루판과 교수형에 쓰는 줄, 가림막 뒤쪽에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가 있다. 마루판 아래의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했던 공간이다. 


사형장 입구/사진-박광준 기자

사진/박광준 기자사형장 내부/사진-박광준 기자

시구문은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로,. 붕괴됐던 것을 1992년에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해 40m를 복원했다. 원래 길이는 약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시신을 받아갈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시구문/사진-박광준 기자 격벽장은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던 운동장으로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격벽을 세워 수감자들을 분리하고 감시했다. 전형적인 원형 감옥 구조인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가운데에 높은 간수 감시대를 세워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해방 이후 철거됐던 것을 2011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 20m 떨어진 이곳에 본디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한센병사에서 본 격벽장/사진-박광준 기자

격벽장/사진-박광준 기자

창고는 서대문형무소 운영에 필요한 물품과 집기 등을 보관하던 건물이다. 1910년대 후반 처음 지었을 때, 길이가 23m였는데, 수감 인원이 늘어나고 옥사가 확장되면서 세 차례 증축해  53m로 늘어났다. 해방 후에는 창고뿐만 아니라 강당, 작업장, 의무실, 욕실 등으로 일부를 쓰기도 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한 후 철거됐던 것을 2019년에 복원했고, 복원할 때 발견한 배수관로와 물을 모으는 시설인 집수정의 유구 등을 보존하고 있다. 유구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이다. 


창고 전경

현재 창고 내부/사진-박광준 기자 

여옥사는 여성 미결수를 가뒀던 구치감으로 1916년 즈음 지어졌다가 1979년에 철거됐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고, 여성독립항일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고난을 겪었다. 여옥사 8호 감방은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 옥중 만세 투쟁이 펼쳐졌던 현장이다. 이곳은 특이하게 지하 공간이 있었는데, ‘유관순이 지하에 갇혔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그 근거는 없다. 해방 후에는 지하 공간을 물품 보관 창고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여옥사 8호 감방/사진-박광준 기자

사진-박광준 기자 

취사장은 수감자들의 밥을 지었던 일종의 밥공장이다. 1923년 만들어져 1937년 증축됐다. 내부는 보일러실, 소독실, 취사실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밥을 지을 때 생기는 수증기를 내보내려고 지붕 위에 배기구를 설치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 후 철거됐던 것을 2010년에 발굴, 복원했고, 발굴 당시에 드러난 보일러 자리, 물을 모았던 집수정, 연기가 밖으로 나가게 만든 길인 연도 등의 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유구전시실, 교육장, 뮤지엄샵,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취사장/자료사진

취사장/자료사진

취사장 발굴 당시 사진/사진-박광준 기자 

망루는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높이는 10m이다. 총 6개 중 현재는 정문과 배면담장 2곳만 남아 있다. 망루의 8면에는 감시창이 설치돼 있고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뒤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를 열었던 당시는 담장 일부만 벽돌이었는데 1923년에 형무소 주변 전체를 4m 높이의 벽돌담으로 쌓았다. 원래 길이는 모두 1,161m였으나 지금은 일부 복원해 앞면 80m, 뒷면 200m를 보존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정면의 망루 담장/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 뒷편 한센병사 옆의 망루/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가 운영되던 기간에 사용하던 옥사 등의 건축물 재료들이다.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이전한 뒤 철거됐던 각종 시설의 잔해에서 모았다. 오른쪽부터 옥사와 옥사를 연결했던 일종의 복도인 회랑의 기초석, 건물의 무게를 지탱했던 줄기초와 독립기초, 기둥 재료, 지붕 마감과 장식재료로 쓰인 두겁석, 취사장의 바닥재, 옥사 건축에 쓰였던 원형 벽돌 등이다.<끝>


서대문형무소 건축부재/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 건축부재/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사진-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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