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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69] 호남의 3걸, 신재 최산두를 배향하고 있는 광양 '신재서원'
  • 이승준
  • 등록 2022-09-08 14:13:06
  • 수정 2022-09-08 16: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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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59-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최산두와 박세후를 향사키 위해 건립했다.


1577~1580년 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鄭淑男)이 최산두(崔山斗)와 박세후(朴世煦)를 향사키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재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숙종 신미년(1691)에 사민(士民)이 중건했다. 이후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따라 철폐됐다가,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최산두(崔山斗, 1482년 ~ 1536년)는 조선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경앙(景仰), 호(號)는 신재(新齋)이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다.


전라도 광양(光陽)에서 아버지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과 어머니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18세에 상경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도 교유했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홍문관 저작.박사, 홍문관 수찬.홍문관 정언 등을 역임했다. 1518년 보은 현감이 됐고,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사람 26명을 선발했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했다.


그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해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한 훈구파를 비판했으나, 그가 속한 신진 개혁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다.




1519년(중종 14)에 사인(舍人)으로 승진됐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전라도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에 유배됐다. 문장이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 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유배지에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교유하면서 사사를 받았는데, 뛰어난 제자로는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柳希春)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화순 적벽(和順 赤壁)을 오가면서 많은 시를 짓기도 했다.


1533년에 해배된 뒤에도 그는 계속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에 의해서 화순 적벽(和順 赤壁)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현재는 유명 관광 명소로 탈바꿈 했다.




그는 유배된지 15년 만인 1533년 자유의 몸이 됐으나, 3년 후인 1536년에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묘는 전남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 모셨다. 사후 1578년 광양군 광양면 우산리 교촌마을에 봉양사(鳳陽祠)를 세워 위패를 모셨고, 1670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도원 서원(道源 書院)에 제향했다. 


박세후(朴世煦)은 조선 중기의 문신. 조광조의 문인. 중종 때 광양현감, 이조좌랑이 됐으나 김안로의 청혼을 거절헤 미움을 샀다. 공조좌랑, 밀양부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명종 때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하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본관 상주. 자 중온(仲溫). 호 인재(認齋).눌재(訥齋).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화(士華)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6년(중종 11) 진사(進士)가 되고, 15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전적(典籍)이 됐다. 1522년 박사가 되나 이듬해 파직되고, 1527년 복직해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528년 광양현감, 1533년 이조좌랑이 됐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그의 미움을 샀다.




1535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장악원첨정에 임명되나 간관의 탄핵으로 파직됐다. 1536년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 등을 거쳐, 1540년 밀양부사로 나가 치적을 쌓고, 1544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돾다. 1545년(명종 즉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9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관련 유적으로는 1775년(영조51)에 건립된 신재선생유허비와 1828년(순조28)에 건립한 봉양사사적비 등이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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