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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70] 송제민을 배향한 서원 광주 '운암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11 22:40:03
  • 수정 2022-09-11 23: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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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운암서원은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 송제민 등을 배향한 서원으로, 운암사(雲岩祠)라고도 한다. 


숙종34년(1708)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을 배향했다.






그 후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의 사촌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를 추배했다. 서원에는 그 외에도 송타(宋柁), 권필(權鞸), 신필(申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추배했다.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洪州).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송정황(宋庭篁)이다.




사항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해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梁山龍).양산숙(梁山璹)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다시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했다.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했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했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돼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1789년(정조 1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됐고, 광주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해광유고'가 있다.



운암서원은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사라졌다가 최근 현 위치인 화암동 화암마을로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운암서원을 철폐한 후 1933년에 건립했던 송제민의 재실(齋室) 영모재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암서원 안에 영모재가 들어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옛 서원자리에 세웠던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도 이건됐다. 지붕돌을 갖춘 유허비는 높이 134m, 폭 45cm, 두께 13cm로, 26자 8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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