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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17] 양인형-양형제 선생 천향한 '위계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8 21:17:12
  • 수정 2022-10-08 22: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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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원(書院)은 선현(先賢)들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묘(四廟)와 후학(後學)들에게 학문(學問)을 강론(講論)하던 강당(講堂)및 재(齋)등을 관리(管理) 운영(運營)하던 곳이다. 


위계서원(書院)은 1527年(중종22年(中宗) 정해(丁亥)에 재실(齋室) 이십 여간을 창건(創建)하고 전경당(展敬堂)이라 했다. 이 당(堂)이 종중(宗中)의 터전으로 대대(代代)로 법도(法道)를 지키는 장소(場所)이고 성묘(省廟)와 세천(歲薦) 때에는 후손(後孫)들이 재숙(齋宿)하는 숙소(宿所)이다. 




그리고 이곳은 60여 정보(町步)의 선산(先山)과 세사(歲事)의 수용(需用)으로 60여 두락(斗落)의 위토(位土)가 있는 종중(宗中)의 총본산(總本山)으로 일컫는 곳이다.


1842年(헌종8년(憲宗) 임인(壬寅)에 종중(宗中)의 첨의(僉議)로 전경당(展敬堂)을 위계(葦溪)의 북록(北麓)에 이건(移建)해여 위계서원(葦溪書院)의 강당이 된 그 당시(當時)에 도내(道內)의 유론(儒論)이 재발(齋發)해 매헌(梅軒) 인형(仁亨)과, 행헌(杏軒) 의형(義亨) 양형제(兩兄弟) 선생(先生)의 직절(直節)과 청명(淸名)을 조두(俎豆)함이 마땅하다 하고, 본원(本院)에 천향(薦享)해 주벽(主壁)이 됐다.




1844年(헌종10년(憲宗) 갑진(甲辰)에 본원(本院)의 사당(祠堂)인 숭덕사(崇德祠)를 창건(創建)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령(翎)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현(顯)을 배향(配享)하고, 1856年(철종7年(哲宗) 병진(丙辰)에 학행(學行)이 우월(優越)하고 도유(道儒)의 의론(議論) 이 수발(隨發)해 허(詡)와 고원군수(高原郡守) 응성(應星), 승사랑(承仕郞), 규(逵), 이조정랑(吏曹正郞) 제(濟)를 추향(追享)해 향사(享祀)했으나, 사당(祠堂)이 협소(狹小)해 규(逵)와 제(濟) 이공(二公)은 봉사(奉祀)를 중단(中斷)했다.


1868年(고종5年(高宗) 무진(戊辰)에 국령(國令)으로 본원(本院)이 훼철(毁撤)되게 돼 재사(齋舍)로 환원(還元)해 위계정사(葦溪精舍)라 했다. 1945年 을유(乙酉) 광복(光復) 이후(以後) 1964年 갑진(甲辰)에 복원(復元)해 규(逵), 제(濟), 이공(二公)을 다시 향사(享祀)케 됐고, 1977年 정사(丁巳) 8月에 오헌(梧軒) 예형(禮亨)과 국헌(菊軒) 지형(智亨) 양형제(兩兄弟) 선생(先生)도 연향(聯享)됐다. 경상남도(慶尙南道) 문화재(文化財) 제(第)38호(號)


숭덕사숭덕사(崇德祠)는 위계서원(葦溪書院)의 사당(祠堂)으로 8世 대사성(大司成) 휘미(諱美)의 4아들 9世 대사헌(大司憲) 매헌공(梅軒公) 휘인형(諱仁亨), 남원부사(南原府使) 행헌공(杏軒公) 휘의형(諱義亨), 목사(牧使) 오헌공(梧軒公) 휘예형(諱禮亨), 대사간(大司諫) 국헌공(菊軒公) 휘지형(諱智亨)과 후손(後孫)들인, 10世 수찬(修撰) 성재(惺齋) 휘령(諱翎), 생원(生員) 전경재(展敬齋) 휘허(諱詡), 12世 와용(臥龍) 휘현(諱顯), 고원군수(高原郡守) 신천재(新川齋) 휘응성(諱應星), 13世 승사랑(承仕郞) 황파(篁坡) 휘규(諱逵), 이조정랑(吏曹正郞) 경암(警菴) 휘제(諱濟) 등(等) 10위를 향사(享祀)하고, 1844年(헌종(憲宗) 갑진년(甲辰年)에 창건(創建)됐다. 


1868年(고종5年(高宗) 무진(戊辰)에 국령(國令)으로 서원(書院)과 함께 훼철(毁撤)됐고 1945年 을유(乙酉) 광복(光復) 이후(以後) 1964年 갑진(甲辰)에 위계서원(葦溪書院)과 함께 복원(復元)됐다./사진-위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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