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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41] 기도와 나눔으로 함께하는 ‘화계사(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5 07:33:09
  • 수정 2024-04-02 03: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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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화계사의 가람배치(2)


# 삼성각(三聖閣)


불교의 여러 신(神)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이다.



산신탱화.칠성탱화.독성탱화산신(山神)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칠성(七星)은 기우(祈雨), 인간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관장한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민간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본래 북두칠성을 말하지만, 불교와 융합되면서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로 격이 상승됐다. 치성광여래불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한다.


독성(獨聖)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각각 모시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 신을 함께 모시고 건물 이름도 ‘삼성각’이라고 부른다.



화계사 삼성각은 경내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다. 본래 있던 산신각을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했던 것을 1975년에 진암(眞菴)스님이 낡은 건물을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이다.


산신과 호랑이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돼 있고 외부 벽화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산신상은 2011년 당시 한말선(大法性) 신도회장의 원력과 시주로 주지 수암(秀岩) 스님이 조성 봉안했다.


# 화계사 국제선원(國際禪院)


만공스님께서 무궁화 꽃으로 쓴 세계일화화계사 국제선원은 사찰 입구 오른편 건물 3층에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이 1984년 처음 개원했을 때는 요사채 방 하나를 사용했으나 사람의 왕래가 잦아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1991년 대적광전이 건립되고 4층에 재개원했다가 2010년 옛 백상원 건물로 이전했다. 2018년 옛 백상원 자리에 국제선문화체험관 및 템플스테이 숙소 건물이 완공됨에 따라, 현재 건물 3층 전체를 외국인 수행체험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년 이곳에서 여름과 겨울 안거를 통해 많은 외국인들이 수행정진 하고 있다.



국제선원 대방 편액 외국인 수행자그동안 국제선원을 거쳐 간 많은 수행자 중에 200여 명이 승려가 됐다. 계룡산 무상사(無上寺) 조실 대봉, 전 주지 대진, 싱가포르 관음선림의 대광, LA 국제선원의 무상, 홍콩 수봉선원의 대관 스님 등이 화계사 국제선원 출신의 대표적인 외국인 승려이다.


이렇게 화계사에 국제선원이 들어서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것은 조실 숭산 스님의 노력의 결과이다. 숭산 스님은 1972년 미국 포교를 시작으로 세계 각국을 돌며 한국의 선불교를 알려, 서양에서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화계사 홈페이지현재 스님이 세운 해외선원만 해도 32개 나라에 120여 곳이 넘는다. 미국에 처음 세워진 프로비던스 선원(Providence Zen Center)에서는 1982년에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 회의를 열기도 했다. 스님의 해외 포교로 한국의 불교가 점차 알려지면서 우리나라로 불교 공부를 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어나 2000년에는 무상사에도 국제선원을 개원하였다. 1999년, 숭산 스님에게서 불법을 인가받은 대봉 스님이 조실로 있다.


# 범종각(梵鐘閣)


1972년에 조성된 옛 범종각은 특이한 2층 6각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당시 화계사에서 가장 멋진 건물이었으나, 오랜 시간 노후화로 인한 안전문제로 철거되고 2010년 3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일 목조 건물인 현 범종각이 건립돼 이 곳에 사물(四物)을 함께 봉안하게 됐다.


종각에 걸어두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를 불구(佛具) 사물(四物)이라한다. 사찰에서 의식의 시작을 알리거나 공양 또는 함께 일할 때 대중을 모으기 위해 사용된다.



사물은 각각의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범종은 땅속 특히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濟度)하고, 법고는 가축과 짐승을, 그리고 목어는 수중생물, 운판은 날아다니는 짐승을 제도한다.


그래서 사물을 모두 치는 것은 이세상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의 법음(法音)을 들려줘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세계로 인도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동종과 함께 걸려 있는 대종은 진암(眞菴)스님이 1978년에 조성했다.


이러한 사물을 한 곳에 모아두는 곳이 범종각이다. 본래부터 이렇게 한곳에 모아둔 것은 아니다. 제법 규모가 큰 절에서는 종은 종각에, 법고는 법고각에 걸어두고, 운판은 공양간 입구에, 목어는 법당에 걸어두고 사용했다. 종각도 없고 법고각도 없는 소규모 절에는 법당이나 요사 등 적당한 곳에 걸어두기도 한다. 절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물을 따로 봉안하는 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화계사 동종(보물 제11-5호)

범종각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종으로 크기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유물이다. 본래 경북 희방사에 있던 것을 1898년에 화계사로 옮겨왔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683년 사인 스님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무게는 300근에 달하고, 2000년 2월 15일에 보물 제11-5호로 지정됐다.


이 종은 가장 윗부분인 용뉴에 쌍룡(雙龍)을 배치해놓았다. 상대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해 장식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이 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하단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갖게 됐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 있어 종 연구와 함께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아랫배 부분을 파내고 거기에 나무막대기를 넣어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데, 수중생물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이라고도 한다.


현재 화계사 목어, 화계사 창건 당시 보덕암 목어로, 스님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목탁(木鐸)은 바로 이 목어가 변한 것이다. 부처님 앞에서 염불이나 독경, 예불할 때나 공양할 때 또는 대중을 모을 때 사용 한다.



그런데 왜 하필 물고기 모양일까? 물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것처럼 수행자들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정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 물고기로 환생한 한 승려의 이야기도 전해온다. 평소 스승의 말을 듣지 않던 제자가 죽은 후 물고기로 태어났다. 그런데 하필 등에 나무가 자라나 파도만 치면 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느 날, 자신의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해 줄 것을 하소연했다. 스승은 의식을 올리고 나무를 제거해준 다음 그 나무로 목어를 만들었다. 그것을 법당에 걸어두고 두드리면서 수행자들에게 경각심을 줬다고 한다.


현재 화계사 범종각에 걸린 목어는 새것이지만, 본래의 것은 고려 때 창건사찰인 보덕암에 있던 목어이다. 오래돼 부스러질수 있어 사용하지는 않지만 함께 걸려 있다.



또 각종 불교의식에 쓰이는 북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말 그대로 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들에게 들려줘 고통에서 구제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각 중앙에 있는 법고는 1972년 옛 종각을 건립할 때 김재호 거사의 시주로 조성한 것이다. 


법고는 대형 북으로 홍고(弘鼓)라고도 부른다. 전통악기의 하나이기도 하며 줄여서 북(鼓)이라고 한다. 큰 것은 지름이 거의 2m 가까운 것에서부터 30㎝ 내외의 소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법고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양면은 소가죽으로 만든다. 한쪽은 수소, 다른 쪽은 암소의 가죽을 사용하여 음양의 조화가 이뤄지게 했다. 몸체에는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두드리는 부분에는 ‘만(卍)’자를 태극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고, 부처의 깨달음이나 서원을 적은 진언(眞言)을 새기기도 한다.



운판은 구름처럼 생긴 판이라서 운판(雲板)이라 한다.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나는데, 공중에 날아다니는 짐승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운판에는 보살상이나 진언이 새겨지고 용과 구름, 달을 새기기도 한다. 본래 선종 사찰에서는 대중들에게 공양시간을 알릴 때 운판을 두드렸다. 부엌은 불을 다루는 곳이고, 구름은 비를 머금고 있으므로 화재를 예방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공양 시간보다는 예경 의식의 도구로 많이 사용한다.


원차종성변법계 願此鍾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 모든 법계에 두루 퍼지소서.

철위유암실개명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지옥(鐵圍地獄)의 모든 어둠도 다 밝아지소서.

삼도이고파도산 三途離苦破刀山 삼도(三途)와 도산지옥(刀山地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일체중생성정각 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 주소서.


# 보화루(寶華樓)


보화루는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큰 건물로 요사(寮舍), 그리고 종무소와 다실로 사용하고 있다. 큰방은 법회 이외에도 불교대학 강의실 그리고 각 신행단체의 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불상이 보인다. 곧 마루에서 바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물은 서울 근교의 왕실사찰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통 대방(大房)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큰방이라는 뜻이다.



보화루에는 군데군데 현판이 붙어 있다. ‘보화루’와‘ 화계사’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고 또 하나의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방을 중수할 때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에는 좌측에 두인, 우측에 ‘대원군장(大院君章) 석파(石坡)’라는 방인의 도서 2과가 있다. 글씨는 예서와 해서를 혼용했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보화루는 1933년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한 수정안을 재검토한 곳이기도 하다. 요사(寮舍)는 스님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이르는 말이다.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은 물론 기도하러 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는 공간도 요사라고 부른다. 


요사 부근에는 창고와 우물, 장독, 세탁시설 등 각종 생활 시설이 한 데 모여 있다. 본래 요사는 법당 뒤쪽에 지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법당 좌우 또는 앞쪽에 지어진 것이 많다. 오늘날에 와서는 필요한 공간에 짓는다. 요사는 대개 법당보다 작고 꾸밈도 소박하다. 일반 한옥처럼 넓은 툇마루를 달기도 하고 누각이나 2층으로도 꾸민다. 화계사에는 보화루 이외에도 조실스님이 거처하는 조실당과 일반스님들이 머무르는 요사가 있다.


보화루 주련


수지왕사일륜월 誰知王舍一輪月 부처님 계시던 왕사성 둥근 달이

만고광명장불멸 萬古光明長不滅 만고에 꺼지지 않는 밝은 빛임을 누가 알리요.

문성공시묘무비 聞性空時妙無比 상대 분별 떠난 본래 자리 묘한 작용 환하게 깨달으니

사수돈입삼마지 思修頓入三摩地 깊이 생각하고 닦아서 삼매에 드옵니다.

무연자심부군기 無緣慈心赴群機 무연자비 방편 따라 많은 중생에게 나아가시니

명월영임천간수 明月影臨千澗水 밝은 달그림자가 천 개의 계곡물에 비추네.

법왕권실영쌍행 法王權實令雙行 부처님이 방편과 실상의 이치를 쌍으로 행하니

뇌권풍치해악경 雷捲風馳海岳傾 우뢰치고 바람이 몰아쳐 바다가 침몰하고 산이 기울도다.

벽력일성운산진 霹靂一聲雲散盡 벼락 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모두 흩어지고,

도가원불섭도정 到家元不涉塗程 고향에 돌아와 보니 원래부터 한발작도 떠난 적이 없도다.


# 고봉스님 추모탑


고봉스님 추모탑은 1978년 8월에 현 미륵석불전이 있는 곳에 조성했으나, 2009년 11월 덕산(德山) 대종사 부도, 적음(寂音) 대종사 부도와 함께 지금의 부도전으로 옮겼고 같은 해 12월 숭산스님의 사리탑을, 2012년 12월 숭산스님 추모비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고봉스님은 만공 대선사의 법을 숭산스님에게 전한 고승이면서 대선사로 1890년에 대구에서 출생했다. 고봉스님은 어린 시절에 유학을 배웠고, 1911년에 상주에 있는 남장사로 출가했다. 1915년에 팔공산 파계사에서 도를 깨달았고, 1922년에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 대선사로부터 인가받았다. 이후 정혜사와 서봉암 조실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달마회를 조직해 거사불교를 발전시키기도 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봉암사와 은적암, 봉곡사, 복전암, 미타사 등에 머무르면서 후학을 지도하였고 법어집 ‘겁외가(劫外歌)’를 남겼다.


‘일체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도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는 전법게를 남기고 1961년에 이곳 화계사에서 세수 72세 법납 51세로 입적했다


# 부도탑(塔)



어느 종교이건 경배 대상이 존재한다. 불교의 경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시킨 불상을 비롯해 각종 신상, 탑, 경전 등이 경배 대상이 된다. 탑은 불교의 여러 예경의 대상 중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네거리에 탑을 세우고 나의 사리를 그 속에 봉안하라”는 유언을 남겨, 열반 후 유언대로 인도대륙의 8개 국가에서 탑을 세웠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탑으로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 부른다. 사리란 유골을 뜻하므로 탑은 곧 부처님의 무덤인 셈이다.


숭산스님 부도탑


탑을 유난히 많이 세운 이는 인도의 아소카 왕이다. 그는 근본팔탑에 봉안돼 있던 사리를 재분배해서 인도 곳곳에 8만 4천 기나 되는 탑을 세웠다. 이때부터 탑은 부처의 무덤에 머물지 않고 부처의 몸으로 경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교가 전래된 곳에는 반드시 탑도 건립됐다.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의 탑은 각각 별도의 특징을 갖고 발달했다. 중국은 벽돌, 우리나라는 화강암, 일본은 목재로 탑을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중국을 전탑의 나라,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재료의 특성에 따라 한국의 탑이 가장 생명력도 길거니와 조각술 역시 뛰어나 삼국 중에서도 압권이라 할 만하다.



탑의 양식 중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탑의 층수는 3, 5, 7 등 홀수로 올라가고, 탑의 면은 4각, 6각, 8각 등 짝수로 조성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홀수를 양수, 짝수를 음수로 여겨 탑에도 음양의 조화를 표현한 것이다.


한편 탑과 비슷한 것이 부도(浮圖)이다. 부도란 고승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그 발생 자체가 탑에서 비롯된다. 즉 고승은 부처와 버금간다는 생각에 고승의 사리도 마땅히 별도로 모셔 경배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부도는 특히 선종에서 발달했고 오랫동안 선의 맥을 이어온 우리나라에서 매우 많이 만들어졌다. 웬만한 절에는 부도가 있다. 특히 규모가 큰 고찰에는 부도전을 별도로 만들 정도로 부도가 많다.


# 화계사 느티나무


화계사 마당과 담장 밖에 450년의 기나긴 세월을 버텨낸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화계사 창건이 조선 중종 17년(1522년) 이고 1618년 화재로 인해 전소됐던 것을 다음 해 다시 덕흥대원군의 시주로 중창했으니 이 느티나무들도 그맘때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계사의 세 그루 느티나무는 조선말 흥선대원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 흥선대원군은 평범하다 못해 남루해 보이기까지 한 옷을 입고 화계사를 찾았다. 세간의 눈을 피해 좀 더 편안한 차림으로 절을 찾기 위함이었다. 도심에서 화계사까지는 십리 길이라 옷은 땀에 흠뻑 젖었고 목도 무척 말랐던 흥선대원군은 절 마당의 느티나무가 보이자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휘적휘적 나무 아래에 당도하니 동자승 하나가 시원한 꿀물을 담은 사발을 들고 있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기특하고도 기이하게 여긴 흥선대원군은 동자승에게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린 이유를 묻자, 동자승은 말없이 그를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했다.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심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의 가람을 훼손해야만 하는 것이어서 고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중죄의 업보를 받더라도 시운(時運)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 만인스님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묘책을 가르쳐 주게 된 것이다. ‘충청도 덕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이 나올 자리이니 남연군 묘를 그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줬다. 남연군 묘소를 이장하자 스님의 말대로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태어나 국통을 이어가게 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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