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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43] 조계사의 말사로 관음성지 33호 ‘도선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6 09:14:20
  • 수정 2024-04-02 03: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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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이번호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本寺)인 조계사의 말사로 관음

성지(觀音聖地) 제33호인 도선사의 역사 및 변천 과정, 그리고 창건주 도선국사, 청담순호 대종사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 다음호에서는 사찰둘러보기를 통해 도선사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예정이다.<편집자주> 



우이동 서쪽에서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를 향해 계곡을 따라 약 1km쯤 올라가면 일주석에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 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고 쓰여진 산문(山門)을 맞게 된다.


도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本寺)인 조계사의 말사로 관음성지(觀音聖地) 제33호이다.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862년(경문왕 2년)에 창건했다. 도선국사는 이곳의 산세가 1천 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내다보고 절을 세운 다음,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을 조각했다고 전한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이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 승병들이 도선사에서 방번(防番)을 서기도 했다.


1863년(철종 14년)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했고, 1887년(고종 24년)에는 임준(任準)이 5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奉安)했다. 또, 1903년에는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하고, 1904년에는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됐다. 근래에 들어와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과 실천불교.생활불교 운동을 전개해 현재와 같은 대찰로 발전했다.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사는 862년(경문왕 2)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는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주장자로 갈라 마애관음보살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보초 임무)을 서기도 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863년(철종 14)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했고, 1887년(고종 24)에는 임준(任準)이 오층탑을 건립하고, 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호국참회원.명부전.삼성각.적묵당(寂默堂).천왕문.범종각.종무소(宗務所).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돼 있고, 법당의 내부 벽에는 달마(達磨)와 혜능(慧能), 청담(靑潭)의 영정이 그려져 있고, 후불탱화.팔상도(八相圖).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


호국참회원은 1968년 11월 20일에 완공한 종합 포교센터로, 지하 1층, 지상 3층, 총 면적 1,000평의 콘크리트 한옥식 건물로, 법당.영사실.도서실.신앙상담실.수련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재 도선사에는 마애불입상(제34호), 목 아미타불 및 대세지보살상(제191호), 석독성상(제192호), 청동종및 일괄유물(제259호) 등 서울시유형 문화재를 비롯해 19세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등의 성보문화재가 다수 있다.


도선사는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했고,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 받았다. 1916년 도선사의 중흥조인 청담(靑潭) 스님이 주지로 취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 등의 시주로 도량을 중수 했다. 이어서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에 입각한 실천불교와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했다.


청담대종사가 주창한 호국참회불교란 신라불교(新羅佛敎)의 통일염원(統一念願), 고려불교(高麗佛敎)의 호국염원(護國念願), 조선불교(朝鮮佛敎)의 구국염원(救國念願)에 근거를 두고, 현대불교(現代佛敎)에서 평화염원(平和念願)에 입각해 수행불교(修行佛敎), 실천불교(實踐佛敎), 생활불교(生活佛敎)로 불교중흥(再興)을 이룩하고 국토를 평화로운 불국 정토로 만들어 가자는 것을 말한다.



삼국 통일의 사상적 근원이 됐고 풍전등화 같았던 국운을 되살렸던 한국불교의 밑바탕에는 참회정진을 통한 호국의 일념이 있었다는 것이 청담스님이 제창한 호국참회사상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청담스님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침체해 있던 한국불교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참회 정진을 통한 중생구제 원력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 사상은 60년대와 70년대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중심사상으로 자리잡았다.


호국참회불교사상은 스님이 친필로 쓴 ‘자비무적 방생도량(慈悲無敵放生道場)’에도 그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킬 때 세상은 너와 내가 따로 없고 하나이며 인종의 차별도 국경도 없는 평등세상이 구현되고 인간방생을 통해 중생을 구제해야 차별과 경계가 없는 평안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서 천년 후 말세 불법이 재흥하리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도선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도선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삼각산 도선사사적’과 ‘봉은사본말사지’ 등에 남아있지만 내용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사찰을 창건한 개산조(開山祖)는 1,100여 년전 신라말엽의 유명한 도승이었던 도선국사이다. 국사는 신라의 국운이 쇠퇴 징조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인 흥덕왕(興德王) 원년(826)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로 15세 때 화엄사에서 출가했다. 스무 살에 동리산(桐裏山)에 계시던 혜철(蕙哲)대사에게서 불도를 전해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23세에는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됐고, 그 후 그가 백계산에 옥룡사(玉龍寺)를 창건하고 주석하자 사방에서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런 스님의 명성을 들은 헌강왕은 스님을 대궐로 모셔서 법문을 듣곤 했는데, 효공왕 2년 스님이 입적하자 왕은 요공국사(了空國師) 칭호를 추증했다.


‘대방중창기(大方重創記)’에 의하면 불법과 천문, 지리의 심오한 이치를 통달한 도선국사는 명산승지(名山勝地)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에 이르자,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한 이곳에서 천년 후 말세 불법이 재흥하리라’ 예견하고 사찰을 건립한 뒤, 신통력으로 사찰 옆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그 한쪽 면에다 20여 척에 달하는 관세음 보살상을 주장자로 새겼다.


# 창건주 도선국사


사진출처/도선사우리나라 풍수도참사상의 비조이자 신라 말 선종산문 옥룡산문의 개조였던 선각국사 도선은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보고 1천년 후 말세에 불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천명했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풍수지리와 도참술의 비조로, 고려왕조를 개창한 태조왕건에게 정신적 이념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이 참다운 고승이라기 보다는 술승 또는 권승으로, 심지어 신화적인 인물인 신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님이 저술했다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등의 풍수도 참류나 ‘편년통록’ ‘용비어천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 관찬서에도 풍수도참사상이나 태조왕건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했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해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됐다.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해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했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고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실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해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 청담순호 대종사 


사진출처/도선사청담스님은 구한말이었던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22년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사색을 즐겼고 3.1운동 시위에 가담했던 정의로운 소년이었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던 박포명스님과 조우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맺었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라는 스님의 마음법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도 놀라웠던 ‘마음’이란 말”에 힘입어 청담스님은 그 마음을 찾는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스님의 첫 출가는 일본에서 이뤄졌다.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1924년 효고현(兵庫縣) 쇼운지(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질색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27세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이었던 서울 개운사 불교전수상원에 입학해 대교과를 수료했다. 이후 마음의 본체를 깨닫기 위해 교(敎)를 버린 스님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두타행으로 일관했다. 최고의 선승으로 각광받던 만공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다. 기어이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청담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上來佛祖鈍痴漢),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安得了知衒邊事)?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若人間我何所能), 길가의 오래된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路傍古塔傾西方).” 사량분별(思量分別)의 한계를 뚫고 반야지(般若智)를 성취한 대장부의 기개가 느껴진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스님을 남겨놓고 도반들이 모두 떠나고 마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선정(禪定)에서 빠져 나온 스님은 도반들이 모두 백담사로 떠난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폭설(暴雪)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 청담스님은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잘 됐다”면서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식량도 떨어진 상황에서 보름이 지났다. 당시 홍천군수와 경찰서장의 꿈에 설악산 산신이 나타났다. “지금 봉정암에 도인이 공부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양을 하라.” 꿈이 일치하는 것이 신기해 두 사람은 봉정암으로 부랴부랴 올라갔다. 피골이 상접한 청담스님을 봤다.


청담스님은 암울했던 시절 민족불교운동에도 앞장섰던 행동하는 수행자였다. 개운사 강원에 재학하면서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했고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이후 비구승이 한국불교의 독립성을 수호키 위해 설립한 선학원의 이사를 맡으면서 젊은 수행자들의 기수가 됐다. 불교정화를 총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사진출처/도선사정화를 향한 원력은 해방 후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함께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참선정진하며 부처님 당시의 승가를 재현한 수행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오늘날 종단 제도의 모태를 만들었다. 청담스님은 성철 향곡 자운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결사에 매진하며 한국불교의 희망을 싹 틔웠다.


불교정화운동을 빼고 청담스님의 행장을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정화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한국불교는 일제가 저지른 사찰령과 대처승 제도로 쑥대밭이 됐다. 자주성을 잃었고 청정성이 무너졌다. 불교정화운동은 청담스님을 비롯한 진보 진영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미 일제강점기에 싹을 틔웠다. 그러나 교단을 장악한 대처승의 장벽에 막혀 돌파구를 좀처럼 찾지 못하던 중 “대처승은 사찰에서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기폭제가 됐다.


1954년 9월 전국비구승대회를 마친 뒤 비구승들은 임시종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종회의원을 뽑고 간부진을 꾸렸다. 청담스님은 도총섭과 총무원장을 연이어 맡으면서 정화운동을 총지휘했다.


같은 해 11월 대처승과의 실랑이 끝에 조계사로 들어가 ‘태고사’ 간판을 내리고 선(禪) 수행 종단임을 표방하는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청담스님은 조계사 법당에서 교단정화 대강연회를 개최해 정화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출범하기까지 소송전과 물리적 충돌의 방식으로 전개된 정화운동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고 비구승의 전의를 일깨워준 것은 청담스님이었다.


“청담스님의 정화활동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간부 스님들을 대동하고 거의 매일같이 내무부 치안국(당시 명동입구)에 들렀다가 문교부(당시 중앙청, 현 광화문 자리)로, 때로는 경무대와 언론기관을 방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교단정화 불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가장 큰 고비는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의 정통성을 부정한 판결이었다. 청담스님은 패소를 예견하고 비밀리에 순교단을 꾸렸다. 이른바 ‘6비구’는 판결일 다음날 대법원 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결행은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출처/도선사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청담스님은 “불교정화는 단순히 비구와 대처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운동”이라면서 군부를 설득했다. 마침내 대처승은 원칙적으로 스님이 아니라는 종헌 개정과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한 통합종단의 출범을 성취할 수 있었다.


제22대 총무원장을 지낸 서운스님은 “승려대회와 6비구 할복사건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청담스님이 기획하고 지휘했다”면서, “스님의 의지와 기백이 아니었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불교신문의 창간 역시 정화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편이었다. 1960년 1월1일 청담스님에 의해 정화이념 홍보를 위한 기관지로 탄생한 불교신문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은 창간사에서 “종단의 발전상 필요한 과제를 비롯해 평론, 교리, 문예 그리고 종보, 교계소식 등 다방면의 원고를 취급할 계획”이라면서, “우리들의 기관지인 만큼 각자가 자기 것이라는 관념 하에” 아끼고 육성할 것을 당부했다.


통합종단의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은 청담스님은 신생종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불교 근대화의 발판이란 전제 아래 △역경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세웠다. 부처님 말씀을 널리 알리고(역경),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하며(포교), 전법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양질의 스님을 키워내자(도제양성)는 게 밑그림이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장기적 계획의 실행은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사진출처/도선사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에 이어 1966년 11월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이 추대됐다. 스님은 “임기 5년을 500만 신도의 정화운동에 바치겠다”면서, “진아(眞我)만이 과도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체”라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청담스님을 회주로 1967년 5월2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불교도 대표자대회에서 청담스님은 미래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세웠다. 대회에서 제안된 모든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종단이 결국엔 달성한 과제들이다. 무엇보다 종단 백년대계의 근본에는 청담스님의 지혜와 원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종단의 성장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담스님이 야심 차게 내놓은 종단발전방안은 선구적이고 진취적이었으나 계파 간의 분열로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승풍실추 사건이 터지면서 정화의 가치가 퇴색하는 지경이었다. 이에 청담스님은 ‘탈종’이라는 극약의 처방으로 종도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중진 스님들의 거듭된 만류로 종단에 돌아온 청담스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웠다. 매일같이 군법당 준공식, 대학 강연, 신도법회 등 포교현장을 누비며 불교의 진면목을 가르쳤던 청담스님은 1971년 11월15일 원적에 들었다.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다비식은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이 마음, 생명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마음은 곧 우주의 핵심이며, 만물의 생명인 것이다.” 청담스님의 설법은 마음으로 귀결된다.


사진출처/도선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원효스님의 일심(一心) 사상을 재구성했다. 마음을 기반으로 한 세계의 원리를 파악하면, 쓸데없는 마음으로 집착하거나 차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인생이며,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무사의(無邪疑)한 이 생명을, 이 마음을,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된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인생이며,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무사의(無邪疑)한 이 생명을, 이 마음을,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된다....나는 영원하며 자유로우며 평등하다.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완전하다.” <청담대종사전서>


청담스님은 마음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 출가했다. 그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마음을 마침내 얻었다. 스님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편재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참나’를 지향했다. ‘참나’란 감각과 개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통찰과 전체로서의 나를 성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을 일컫는다. 불교정화의 궁극적 목표 역시 국민 개인의 마음을 맑히는 사회정화였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정하게 밝지 못하면 만사를 원망과 질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미신이 생기는 법이다. 내 마음에 때가 있으면 남도 때가 있어 보이고, 내 마음이 깨끗하면 남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밝혀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다음 호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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