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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6] 마의태자 은행나무의 전설이 있는 '용문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9 09:51:50
  • 수정 2024-04-02 03: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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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다.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했고, 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했다. 1395년(태조 4) 조안화상이 중창했고,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1457년(세조 3) 왕명으로 중수하는 등 중.개수를 거듭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문산을 중심에 두고 북쪽에는 봉미산, 동쪽에는 중원산, 서쪽으론 대부산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는데, 용문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빼어나며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이름이 높다. 이 산 서쪽에는 사나사, 동쪽에는 용문사가 터잡고 있다.


용문사의 일주문은 용문(龍門)으로, 썩 잘 만든 솜씨는 아니나 두 기둥을 용이 꿈틀거리며 휘감아 오르는 일주문은 용문사를 상징하고도 남는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과 병화로 절 자체는 옛모습을 잃었으나 용문산의 울창한 숲과 계곡의 경관이 뛰어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용문사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국사가 중창했다. 이 창건설 외에 913년(신덕왕 2)에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이상의 근거는 없다. '양평군지'에 의하면 창건 당시 당우가 304칸에 300여 스님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뒤 약 450년간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훌쩍 1378년(우왕 4), 지천(智泉)대사가 개풍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우왕이 원각(願刻)한 대장경판을 이곳으로 옮겨 3칸짜리 대장전을 짓고 봉안했다는 데로 이어진다. 1395년(태조 4) 조안(祖眼)대사가 중창하는데, 바로 그해 천마산 적멸암에서 조안대사의 스승 정지(正智)국사가 입적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한 정지국사 부도가 용문사에 세워진 내력은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천마산에서 다비를 치른 며칠 뒤 제자 지수(志脩)의 꿈에 “너희는 어찌하여 사리를 거두지 않고 버려두느냐”고 힐난하여 비로소 수많은 사리를 수습하게 된다. 이에 조안대사를 비롯해 국사의 제자들이 중창중인 미지산 용문사로 사리를 옮겨 부도와 비를 조성코자 왕께 알리니(무인년 여름), 왕은 권근에게 비문을 짓게 한다.





용문사는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를 위해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했다. 이듬해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었다. 이 경찬회 법회에 참석해 기도하던 수양대군은 불사리의 방광을 목격하고 원찰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어 세조와 성종을 비롯해 왕실에서 종종 중창했으나, 1907년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다가 일본군들이 불태우는 비운을 겪는다. 취운스님 등이 재건을 거듭해 내려오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던 용문산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용문사의 자취에는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비극이 서려 있다.




1958년 이후 재건해 오늘에 이른 용문사 경내에는 대웅전.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다.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 산신각 동쪽에 5기의 부도가 있고, 절마당 아래로는 수령 1,100년쯤으로 추정되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된 나무가 이 은행나무다. 여름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해 몸체를 보기 어렵지만, 늦가을이나 겨울에 가면 천년 세월을 견뎌온 은행나무의 온전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어디 한 곳 물기를 빨아올릴 것 같지 않은 고사목 같은 나무인데, 봄이면 어김없이 수액을 날라 가지 끝 잎마다 먹여 푸른 잎을 돋게 하는데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라고도 하고,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버린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랐다고도 하는 전설을 간직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이다. 가을이면 주변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다.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용문사 은행나무 나이는 대략 1,100여 세. 원효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연대를 기준으로 계산한 나이다. 하지만 이 은행나무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자랐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풀 길 없어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지팡이까지 버리기 위해 꽂아놓고 떠난 것이라고도 한다. 사실 여부는 알 도리가 없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게 되자 935년(경순왕 9) 신라를 고려에 넘기고자 했다. 이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거늘, 어찌 힘을 다하지 않고 천년 사직을 가벼이 남의 나라에 넘겨줄 수 있는가”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며 시랑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보내 고려에 항복하고 만다.


이에 태자는 통곡하면서 아버지를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해 집을 짓고 풀을 뜯어 연명하면서 베옷[麻衣]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천년 사직과 백성을 남의 손에 넘겨준 구차한 죄인이 어찌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단 말이냐면서 처절한 고행을 자처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왕자는 마의태자로 불리게 됐다.




마의태자의 전설이 전해 내려와서인지 용문사 하면 으레 마의태자가 심은 은행나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마도 슬픈 이야기일수록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남는가보다. 춘원 이광수는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마의태자의 자전적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해 암울한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의 검열에 걸리지 않는 한도내에서 애국정신을 북돋우려 한 바 있다.


거듭되는 병화와 전란 속에서도 은행나무만은 무사히 살아남았대서 한때 천왕목(天王木)이라 불렀고, 조선 세종 때는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한 유명한 나무다. 오늘도 청청하게 살아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 62m, 가슴둘레 14m, 가지는 동서로 27.1m, 남북으로 28.4m가 뻗어 있다.




입적에 든 지 3년 만인 1398년(태조 7)에 정지(正智)국사 부도와 부도비가 건립됐다. 부도는 현재 용문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300m쯤 떨어진 동쪽 한가로운 언덕바지에, 부도비는 거기서 80m 정도 아래로 곧장 내려오면 편편한 천연의 바위면에 조촐하게 서 있다. 부도 높이는 215㎝, 부도비 높이는 110㎝로 보물 제531호이다.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부도이나 지대석과 하대석은 방형으로, 중대석은 원형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매우 돋보인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편인 부도는 여러 장의 장대석으로 부도의 구역을 마련하고 그 중앙에 부도를 건립했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방형이고 중대석은 원형이며, 상대석과 몸돌·지붕돌은 8각으로 조성돼 있어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에서 많이 변형된 부도라는 점이 눈에 띈다.



지대석은 장대한 판석을 둘러 넓게 자리잡았다. 그 위에 하나의 돌로 마련된 하대석은 아랫단에 구형을 돌리고 각 모서리를 비롯해 4면에 잎을 아래로 내려뜨린 연꽃문을 돌렸고, 하대석 윗면에는 낮고 높직한 2단의 굄대를 놓고 중대석을 받았다. 중대석은 둥근 곡선을 유지하고 있을 뿐 장식은 없고, 8각 연꽃받침으로 된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그 위에 놓은 8각 몸돌은 각 면에 우주가 모각돼 있고, 정면에만 문비(門扉)형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역시 퇴화된 양식이다.


몸돌 위로 3단의 각형 받침이 있는 지붕돌을 얹었다. 처마 밑엔 낮은 부연이 표시돼 있고, 모서리마다 각형 서까래가 조각돼 있고, 지붕돌 낙수면은 8각 우동(隅棟)이 두드러져 있다. 전각부에는 귀꽃무늬가 장식돼 있으나 앞시대에 비해 형식만 남아 있는 소박한 모습이다. 상륜부는 둥근 연꽃받침이 있으나 그 위로는 없어졌다.




부도에서 아래쪽으로 80m쯤 내려가면 넓적한 바위면에 점판암(粘板岩)으로 다듬은 부도비를 척 꽂아 세웠다. 이 부도비는 본래 지금의 자리 위쪽 바위면에 홈을 파고 비몸을 꽂았다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때 비좌에서 비신이 빠져나와 경내에 나뒹굴었다고 한다. 이를 1970년 지금 자리에 세웠다. 


비신을 받는 비좌가 천연의 바위 그대로이다. 본래는 지금의 자리 위쪽 바위면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비신 가장자리에서 약 3㎝ 정도 안으로 가는 선을 빙 둘러 긋고 그 안에 비문을 음각했다. 비신에 약간의 훼손은 있지만 대수롭진 않고 글씨도 선명하다. 비문은 당대의 명신이며 학자인 권근이 국사의 행적을 더듬어 지었더, 비문의 글씨는 정갈스럽고 치밀한 구성으로 쓰여졌음이 확연하다. 글자를 20행에 44자씩 썼고, 뒷면에는 21행의 형식으로 당시 동참자의 명단을 새겨뒀다. 앞뒷면 모두 글씨에는 훼손이 없다.



고려 말 고승 정지국사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에 장수산 현암(懸庵)에서 출가했다. 처음부터 참선공부로 들어갔던 국사는 1353년(공민왕 2)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 지공(持空)화상과 대면한다. 거기서 먼저 들어와 있던 나옹화상을 만나고, 중국 여러 곳을 만행하면서 수도하다 3년 만에 귀국한다. 나옹과 무학대사의 명성은 높았으나 정지국사는 자취를 숨기고 수도에만 전념하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세수 72세로 입적했다.


그런데 입적 후 사리 수습을 미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자 지수의 꿈에 사리를 거두라는 분부가 내렸다. 바로 그해 제자 조안(祖眼)은 용문사를 중창하고 있었기에 수습된 사리를 용문사로 모셔와 부도와 부도비를 건립했고, 태조는 정지국사로 추증했다.



대한제국 때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당시 용문산과 용문사는 양평일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권득수 의병장이 용문사에 병기와 식량을 비축해두고 항일활동을 펼치면서 일제에게 타격을 입혔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 보병 25연대 9중대와 용문사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1907년(융희 1) 8월 24일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러 사찰의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됐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취운(翠雲)이 사찰을 소규모로 재건해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25전쟁 때 파괴돼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산령각(山靈閣).종각.요사(寮舍) 등만 남게 됐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했다.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부도 및 정지국사탑비가 있다.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경내에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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