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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둘러보기3] 실용적인 구조로 돼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화성(3)’
  • 박광준
  • 등록 2022-11-16 22:03:41
  • 수정 2022-11-16 22: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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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다음호에 계속


# 화성 포루


수원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을 방어키 위해 설치한 포진지(砲陣地)이다. 성벽의 일부를 凸자 모양으로 외부에 돌출시켜 치성(雉城)과 유사하게 건물을 배치하고, 3층의 내부를 공심돈(空心墩)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춰 뒀다가 외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하부의 3~6단은 화강석의 석축을 쌓고 그 상부는 벽돌을 쌓았고, 위층에는 목조의 건물을 세웠다.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넓이가 모두 옛날의 성을 짓는 방식을 따랐다. 화성 성내에는 동북포루.동포루.북서포루.서포루.남포루 등 모두 5개소에 포루를 설치했다.


# 동포루/1796년(정조 20) 창건, 1979년 복원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다.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서는 규모를 줄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계돼 있지만 지형과 주변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이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했다.


# 서포루/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다.


# 남포루/1796년(정조 20) 창건,1975년 누각 복원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돼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 북동포루/1794년(정조 18) 창건, 1977년 복원



북동포루는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돼 있다.


# 북서포루/1794년(정조 18) 창건, 1975년 복원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 화성 각루


각루란 성곽 주위를 감시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고 대개 전망이 좋고 높은 곳에 설치한다. 화성에는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서북각루 등 4곳의 각루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면서 아름다운 각루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고 용연이라는 연못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 지형을 살려 정자를 꾸몄다. 방화수류정의 정면 기단부는 여느 건물과 같이 돌을 쌓아 네모 반듯하게 꾸민 것이 아니라, 돌을 가지고 마치 목조의 틀을 짜듯 했고 그 사이 벽면을 벽돌로 채우고 있다.


서북각루는 화서문의 남쪽에 위치하고 5량(五樑) 4칸으로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서남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용도(甬道)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높고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화양루에서는 수원의 서남쪽을 편히 볼 수 있다. 누의 규모는 6칸인데 남쪽으로 2칸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렀으며 삼면에 판문을 내었다.


# 동북각루/보물 제1709호, 1794년(정조 18) 창건, 1934년 해체.수리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은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만들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 서북각루/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 동남각루/1796년(정조 20) 창건, 1979년 재건, 2016년 해체.수리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一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 서남각루/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화성 축성 초기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암문 바깥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화성을 찾은 정조는 화양루에서 시작하여 성곽 일대를 두루 살폈다.


# 화성 암문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키 위해 설치된 문을 암문이라고 한다. 화성에는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서암문(西暗門), 서남암문(西南暗門), 남암문(南暗門) 등 5개의 암문이 있었다. 하지만 팔달문과 남수문터의 중간에 있었던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사라졌다.


북암문은 방화수류정 동쪽에 있고 성밖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1795년(정조 19) 2월 23일 홍예(虹霓)가 이뤄졌다. 동암문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1796년(정조 20) 3월 25일에 홍예가 이뤄졌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고, 홍예는 성의 안과 밖에 축조되었고 그 중간에는 홍예개판(虹霓蓋板)을 장대석으로 건너질렀다.


서암문은 서장대 남쪽 팔달산 남쪽 기슭의 사이에 있다. 1796년(정조 20) 6월 18일에 홍예가 이뤄졌다. 서암문은 지형상 북암문 동암문과 같이 성곽를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기 곤란하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다.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에 있는 서남각루로 나가는 암문이다. 암문 중 유일하게  위에 포사 1칸이 있다. 1796년(정조 20) 8월 6일에 홍예가 이뤄졌다. 이곳은 산쪽 높은 곳으로 성의 서남방향 조망이 좋은 곳아 특별히 적을 감시하는 포사를 설치했다.


# 북암문/1796년(정조 20) 창건, 1972년 수리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 동암문/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복원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 서암문/1796년(정조 20) 창건,1975년 수리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해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서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키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1796년(정조 20) 창건,1975년 서남포사 복원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 화성 노대


수원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있다. 노대란 원래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높은 위치에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구축한 진지였다. 화성 노대는 이곳에 올라 적들의 공격 상황을 측후해 지휘소와 성 전체에 오방색 깃발 등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고 반달 모양의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다. 전돌을 쌓아 네모 모양의 대로 만들었는데 모서리를 깍아 모를 없앴다.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는 팔각형이며 사각 받침대 안에 쇠뇌를 설치했다고 한다.


# 동북노대/1796년(정조 20) 창건, 1976년 수리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됐다. 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 서노대/1795년(정조 19) 창건,1971년 복원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 화성 공심돈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해 적군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도 활용되는 곳이다. 공심돈은 돈의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수원화성에는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3곳의 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화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또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구멍으로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서북공심돈은 전돌로 벽체를 사각으로 쌓고 외부로 구멍을 내어 바깥 동정을 살피고 백자총 등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로 오르내리도록 돼 있는데, 다른 성곽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東稚) 위에 세워져 있으면서 대체로 서북공심돈과 같지만 규모가 약간 작다. 동북공심돈은 척후시설이고 서북공심돈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평지가 아닌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고 사각기둥이 아니라 원통형으로 돼 있고 내부는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거쳐 꼭대기에 오르게 돼 있다.


#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1796년(정조 20) 창건, 1934년 수리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 동북공심돈/1796년(정조 20) 창건,1976년 복원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 화성 적대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의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 옆에 있는 치성(雉城) 위에 설치한 방어시설물이다. 성곽의 중간에 약 82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해 화창이나 활, 화살 등을 비치하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했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적대는 반만 성곽 밖으로 돌출되고, 반은 성 안으로 돌출돼 있다. 화성에 설치됐던 적대는 총 4개로, 팔달문에 남동적대와 남서적대, 장안문에 북동적대와 북서적대가 있었는데 2008년 현재 북동적대와 북서적대만 복원돼 있다.


장안문의 동쪽에 있는 북동적대는 1969년 보수한 바 있다. 적대의 돌출 길이는 8.9m, 높이는 6.7m, 폭은 6.55m이다. 여장(女牆;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중심 간 길이는 남북으로 12.1m, 동서로 5.75m이고 ‘凸’형태이다. 성벽 전면에 3개의 현안(懸眼; 성벽의 위에서 아래로 군데군데 낸 홈)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을 만들었다.


장안문 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는 높이 6.7m, 아랫부분의 폭은 7.8m, 윗부분 폭은 아랫부분보다 좁아진 6.4m로, 형태는 북동적대와 거의 같다.


# 북동적대/1795년(정조 19) 창건, 1969년 수리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동북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적대가 있는 경우로 드물다.


# 북서적대/1795년(정조 19) 창건, 1968년 수리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을 세 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화성 치성


동일포루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치성의 '치'는 '꿩'이란 뜻을 가진다.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치성 위에 지은 집을 포루(鋪樓)라고 한다. 화성에는 이러한 치성이 10곳 있는데, 포루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있다. 동일치(東一稚), 서일치, 서이치, 용도서치, 용도동치, 동일치, 동이치, 동삼치, 남치, 북동치가 있고 150m마다 치성이 세워져 있다. 화성에는 치성을 응용해서 적의 침략을 막으려는 공심돈(空心墩), 포루(砲樓), 포루(鋪樓), 적대(敵臺) 등이 세워져 있다.


# 용도/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잡고 있다./사진출처-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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