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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50] 조선후기 김창집 등 4인의 선현 추모하고 있는 '사충서원'
  • 이승준
  • 등록 2022-12-11 08:39:04
  • 수정 2022-12-11 08:4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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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사충서원은 조선왕조 경종1년과 2년(1721-1722)에 걸처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때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 )(뒤에 영조)을 병약한 경종의 대리로 참정을 시킬 것을 건의하다가 왕권 찬탈의 의도가 있다는 참소로 인해 사약을 받고 희생된 몽와 김창집(영의정 蒙窩 金昌集), 소재 이이명(영중추부사, 전 좌의정 疎齎 李頤命), 이우당 조태채(판중추부사, 전 우의정 二憂堂 趙泰采), 한포재 이건명(좌의정 寒圃齎 李健命)의 네 분 충신의 충의정신을 기려 1726년(영조2년)에 영조가 사액을 내려 어명으로 제각과 원사 고직이 건립됐고, 매년 춘추에 제향을 올리고 유생들의 교육의 장으로 사용됐다. 

 

사충서원은 1726년(영조2년)에 처음 과천현 노량진에 건립 됐다. 이는 당시 과천이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정미환국 등 정변으로 서원이 철훼됐지만 영조 16년 (1740-경신) 경신처분으로 위 네 분이 충신으로 복위되고 영조32년 (1756-병자) 2월에 왕명으로 과천현 노량진 옛터에 서원이 다시 복건됐다. 사충서원은 1868년(고종5년)에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전국의 미사액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철폐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였다.



1927년(정묘 - 서원이 중건된지 172년된 해)봄에 노량진에 있던 서원 터 가 경부선철도 개설로 노량진 역사가 자리잡게 돼 당시 고양군 한지면 보광동(현 용산구 보광동 한강변)으로 옮겨 제각과 원사가 이전 건립 됐다. 일제가 경부선철도를 부설하면서 굳이 사충서원이 있는 터에 노량진 역사를 짓는다는 핑계로 서원을 철훼한 것은 왕조의 기운을 훼손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사림의 주장이 있었고 이에 따라서 사림의 유력인사가 주동이 돼 이건비용을 모금한데다 보상금을 보태어 보광동에 제각과 원사 그리고 정문 세칸, 동쪽 뜰에 큰비석이 세워진 규모로 건립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원이 파괴되고 피난민들의 가옥이 난립돼 제각이 훼손되고 일부 잠칭회원들이 허위의 총회 회의록을 작성 행사해 서원의 기지가 망실돼 그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968년 이완규(유림) 이병도(국사학자, 문교부장관),정구충 (외과의사) 김성진(정당인, 의사) 김충현 (서예가), 이일우 (초대부통령 수석 비서관) 이현 (방송인), 김창현(창문여고 교장), 조원복(고려피혁 사장), 이천수(백강공파 종회장) 이상혁 (변호사, 판사) 등 사림의 덕망가들이 결집해 조선왕조 후기의 문예부흥과 왕권확립을 이룩한 영조를 옹위해 왕위에 오르게 하다가 목숨까지 바친 네 분의 충신을 모신 사충서원을 복원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나라사랑과 충성의 사표가 된다고 여겨 사림들로부터 쟁재를 모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상산곡리 100-2(현 하남시 상산곡동100-2)에 기지를 장만하고 제각과 원사 및 삼문을 복원 건립하고 서원 앞뜰에 묘정비를 세웠다.



사충서원의 영원한 존립을 위해 1968년 12월 12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등기 제27호로 등록 출발했다. 이병도 (李丙燾 서울대 대학원장, 국사학자), 정구충(鄭求忠), 서울대교수, 외과의사), 박성수(朴性洙 성균관장), 김성진( 金聖鎭), 문공부장관), 이상혁(李相赫 변호사) 등 이다.


매년 가을 음력 9월 하순 주말에 추모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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