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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76] 원효대사가 지은 곡성 '도림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05 21:18:43
  • 수정 2024-04-02 04: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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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곡성 도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660년(태종무열왕 7) 원효(元曉)가 창건했는데, 그 당시 풍악의 음률이 온 산을 진동했다 해 동악산이라 하고, 도인(道人)이 숲같이 모여들었다 해 도림사라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582년경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절을 창건하고 신덕사(神德寺)라 했는데, 660년 원효가 사불산화엄사(四佛山華嚴寺)로부터 옮겨와서 도림사로 개칭했다고도 한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국사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지환(知還)이 중창했고, 조선 말기 처익(處翼, 1813∼1888)이 산내암자인 길상암(吉祥庵)을 창건했다고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보이는데, 당대의 유명한 목수장(木手匠)이자 승려인 영해(影海)도 도림사에서 주석했다. 


길상암은 현재 옛터 위에 토굴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중심건물인 보광전(普光殿)을 비롯, 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응진당(應眞堂).궁현당(窮玄堂).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으로 겹처마에 단청이 있고,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이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문화재는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림사괘불이 있는데 1730년(영조 6)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세로 300㎝, 가로 278㎝이다. 절 앞 약 500m 지점에 5기의 부도(浮屠)가 남아 있고, 절 앞 계곡에는 반석이 좋아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절 일원이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도림사가 있는 동악산은 원효대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온산의 풍경이 음률에 동요돼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렸다고 해 동악산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기암괴석을 이루고, 넓은 암반에는 조선시대 이래 근세에까지 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흔적을 글씨로 새겨놓았다. 해발 735m의 동악산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동악계곡(도림계곡), 성출 계곡에는 아홉 구비마다 펼쳐진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노송과 폭포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국사 도선(道詵)이 중건하고 지환(知還)이 중창했고, 조선 말기 처익(處翼, 1813∼1888)이 산내암자인 길상암(吉祥庵)을 창건햇다고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보이는데, 당대의 유명한 목수장(木手匠)이자 승려인 영해(影海)도 도림사에서 주석했다. 


길상암은 현재 옛터 위에 토굴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중심건물인 보광전(普光殿)을 비롯, 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응진당(應眞堂).궁현당(窮玄堂).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으로 겹처마에 단청이 있고,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이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이다.



문화재는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림사괘불이 있는데 1730년(영조 6)에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세로 300㎝, 가로 278㎝이다. 절 앞 약 500m 지점에 5기의 부도(浮屠)가 남아 있고, 절 앞 계곡에는 반석이 좋아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절 일원이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도림사가 있는 동악산은 원효대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온산의 풍경이 음률에 동요돼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렸다고 해 동악산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기암괴석을 이루고, 넓은 암반에는 조선시대 이래 근세에까지 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흔적을 글씨로 새겨놓았다. 해발 735m의 동악산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동악계곡(도림계곡), 성출 계곡에는 아홉 구비마다 펼쳐진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노송과 폭포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 보광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普光殿木造阿彌陀三尊佛像)


17세기에 조성한 목조불로 본존불은 1665년, 좌우 보살상은 1680년에 조성했다. 본존불은 전체 높이 122cm, 관음보살좌상은 119.0㎝, 대세지보살좌상은 117.0㎝이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은 머리를 육계가 없는 나발로 표현했고 얼굴은 사각 모양의 원만한 상호이며 눈은 옆으로 길게 표현했다. 법의는 변형 우견편단(右肩偏袒:오른쪽 어깨에 법의를 걸치지 않고 맨살을 내놓은 모습)으로 두툼하게 표현했는데, 법의 자락이 일직선으로 흘러내려 복부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중지와 엄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협시불인 관음보살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수식과 각종 꽃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양 어깨를 덮고 있는 보발은 두 가닥을 이루면서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사각 모양이고 입은 다물었고 눈은 반개한 채 아래를 보고 있다. 법의는 변형 우견편단 형식이며, 결가부좌한 무릎을 군의 자락이 덮고 있다. 관음보살은 왼손에 꽃 문양을 새긴 보병을, 대세지보살은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은 도림사 보광전의 후불화로 봉안돼 있는 아미타여래설법도로 1730년 철매(哲梅)의 증명 아래 수화원(首畵員) 채인(彩仁), 진행(眞行), 즉심(卽心), 각천(覺天), 책활(策活) 등이 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을 주도한 채인과 즉심은 1723년 흥국사와 1725년 송광사 불화 제작 때 의겸(義謙)을 수화사로 모시고 함께 작업을 한 대표적인 의겸파 화원이며, 진행과 각천은 1730년 운흥사 괘불 조성 때 의겸을 도왔다. 


또한 의겸을 비롯해 채인, 덕민, 지원, 각천, 책활 등은 같은 해(1730년) 공주 갑사의 ‘석가여래삼세불도’를 함께 제작하였을 만큼 이 들은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림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의 제작 의도와 달리 단독의 후불벽면에 걸기 위해 조성된 불화로서, 갑사의 그것 보다 좌우 폭이 넓어졌으나, 인물의 표현이나 구성, 묘선, 색채, 문양 등 도상이나 양식의 면에서 대체로 갑사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8세기 최고의 화승 의겸의 화풍이 그의 유파 화원들에게 어떻게 스며들고 발전돼 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특히 적.녹색의 강한 색 대비 속에 백색, 황토, 양녹, 갈색 등 부드러운 중간 색조가 안정적으로 뒷받쳐 주고 있는 설채법, 그리고 주저 없는 유려한 필선, 중후한 이목구비를 가진 상호 등에서 1724년 송광사 응진전 영산회상도, 1725년 송광사 영산회상도 등 당대의 최고의 화승(畵僧)의겸(義謙)의 화풍을 잘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를 비롯한 팔대보살, 그리고 권속들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짜임새 있는 화면구성을 갖추었고, 정취하고 유려한 필선과 중간 톤의 안정된 색감과 문양을 통하여 우수한 화격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기 유행한 화풍과 화사간의 교류를 통한 화맥(畵脈)의 전승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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