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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77] 진주성 안에 있는 '호국사'와 ‘창렬사’
  • 박광준
  • 등록 2023-01-07 10:48:52
  • 수정 2024-04-02 0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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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 호국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안에 있는 전통 사찰로, 고려 말기,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주성(사적 118)을 수축했다. 승병(僧兵)을 양성키 위해 성 안 서장대와 창렬사 사이 골짜기에 세운 사찰로, 전통 사찰 제70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본거지였고,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수많은 승병들이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전사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으나, 전란 후 성과 함께 전사한 승병들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이 호국사란 이름을 내리고 다시 세웠다.


진주성을 보수.정비하는 과정에서 호국사의 일주문(一走門)자리가 발견돼 새로 세웠고, 그 밖의 건물들은 모두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경남문화재자료 8), 영남포정사(경남문화재자료 3) 등의 문화재와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창렬사 등이 있고, 주변에 방어산, 월아산, 반성수목원, 진양호, 국립진주박물관, 금호지, 향토민속관 등 관광지가 있다.


# ‘창렬사’





창렬사는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해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했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됐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해 중수됐다. 김시민 목사의 신위는 본래 진주성 안에 있었던 충민사(忠愍祠)에 모셨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훼철되자 이곳 창렬사 주변에 옮겨 모셨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고, 동.서무, 내.외삼문, 비각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사당의 현판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썼다. 현재 진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또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중앙의 정사(正祠)에는 김시민, 김천일 외에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進),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진주목사 장윤(張潤),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종부시주부 유복립(柳復立) 등 7위가 모셔져 있고, 나머지 신위는 동사(東祠)와 서사(西祠)에 모셔져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지내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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