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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78] 오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무위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11 05:04:07
  • 수정 2024-04-02 0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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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 말사이다. 무위사는 본 절에만 23동 건물과 35개 속암을 거느릴 정도의 대찰에 속했으나 거듭된 화재로 규모가 축소됐다. 현재 경내에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전각 앞에 1678년에 세운 ‘괘불대’가 있고 서쪽에 성보박물관이 있고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탑비’와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선각대사탑비’ 북쪽으로 미륵전과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내에서 떨어진 독립된 공간에 천불전이 남동향해 위치하고 있다.



1739년 무위사 주지 극잠이 쓴 ‘전라좌도강진월출산무위사사적’(이하 ‘무위사사적’이라 칭함) 기록에 의하면, 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관음사’라고 불렀고 대광명전, 미타전, 비로전, 동선당, 서승당 등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효 스님의 생몰년과 사찰 창건 시점이 맞지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94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생몰년과 건립 시기가 맞지 않다.


‘무위사사적’에는 도선국사가 875년 2중창을 하고 ‘모옥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무위사는 1407년 천태종 17개의 자복사 중 하나로 지정됏고, 이후 1555년 태감선사가 4중창을 이루고 ‘무위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때 비로전, 미타전, 영산저, 문수전 등 전각과 35개 처에 달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 이후 무위사 기록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 문서 가운데 ‘사찰고’에서 간략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1909년 내무부 소속 지방국사사과에서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무위사는 안주면 월출산에 있고 본존불명은 ‘阿彌陀佛아미타불’로 표기했다. 관리자는 ‘정성희’로 군수가 차임한 인물이었고, 사찰 소유 논밭이 4마지기가 있어 그 수입으로 유지했다. 연혁 부분에는 ‘月比菩薩이 一次修葺함’이라 기록했다.




1934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는 극락보전을 보물 제67호 ‘무위사 극락전’으로 지정했다. 이후 1935년 해체수리를 진행하고 1943년에는 우천시 누수로 인한 지붕수리를 진행했다. 해방 이후 1962년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으로 승격했다.


1974년에는 성보박물관을 건립해 극락보전에서 분리한 내부 벽화 27점을 보관하고 해탈문, 분향각, 천불전, 미륵전을 중건했다. 1982년에는 극락보전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한 명문을 통해 1430년 극락보전 건립을 확인했다. 이후 산신각, 요사채 등이 건립되고 2001년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상’과 후불벽화 ‘백의관음도’ ‘내벽사면벽화’ 일괄 29점 등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 아미타삼존불도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강진 무위사 성보박물관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해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해 원근감을 표현했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삼존상과 벽화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됐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 수월관음벽화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성보박물관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로,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고,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해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함께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 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면서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 아미타내영도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돼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했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는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고,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했고,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했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다.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됐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해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고,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7호로 지정됐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무위사 극락보전 서쪽 약 30m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있다. 귀부(龜趺)·비좌(碑座).비신(碑身).이수(首) 등을 다 갖춘 전통적 양식의 비이다.


귀부의 두부(頭部)는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한 용머리이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투조(透彫)로 됐다. 거북의 등에는 6각갑(六角甲)무늬를 양각하고 비좌의 앞뒤 2면에는 보운(寶雲)무늬, 양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양각.음각으로 새겼다. 이수에는 3단의 층급형(層級形) 받침을 새겨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비제(碑題)는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 幷序’라고 시작해 지은이 최언휘(崔彦)와 쓴이 유훈율(柳勳律)의 성명을 기록했다. 각부의 조각기법은 당대의 다른 비석에 비해 사실(寫實)의 경향을 띠어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 무위사 삼층석탑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됐다. 현재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946년) 바로 앞에 있다. 조성연대는 탑비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했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의 중석이 연결돼 있다. 각구를 2구로 나눠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했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됐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돼 있다.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했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해 세련됐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됐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해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구륜.보주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됐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이다. 그 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삼존불을 모신 전각이고 국보 제1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1430년에 건립했고 무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전각 안에는 1476년 조성한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 등 20여 점이 넘는 벽화가 있었고, 현재 후불벽화를 제외하고 모두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전면3칸, 측면3칸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1,162.3cm, 측변 789.5cm이고 전면과 측변 주간거리 비율은 1:0.68이다. 어칸이 협칸보다 좁은 것이 특징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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