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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79] 남방제일선찰 '천은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18 08:06:04
  • 수정 2024-04-02 0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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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광대한 지리산자락이라 교통이 불편했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다. 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 가득한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하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보람일 것이다. 


천은사 전경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해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돼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해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했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해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됐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했고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했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됐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했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뤄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돼 있다.



# 천은사 설화와 전설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했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했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 부도전



부도(浮屠)는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는 부처님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 붓다(Buddha)에서 유래됐다고도 하고 탑을 뜻하는 스투파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부도라고 하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의미한다.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주검을 화장해 그 유골을 거두는 장골(藏骨)이라는 불교식 장제가 널리 유행하게 됐다. 그에 따라 부도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스님들의 지위가 높아져 불탑처럼 스님의 부도도 많이 건립하게 됐다.


용담당 부도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과 불상 등 법신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건립하는 반면에 승탑인 부도는 사찰 주변의 호젓한 곳에 석비와 함께 조영됐다. 부도는 불탑과 구분해 단층의 건물 모양을 하고 있고 고려시대부터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기도 했다. 부도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과 종형 또는 복발형의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불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고 상륜부는 불탑보다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영해당 부도

탑비(塔碑)는 고승의 부도에 부속돼 석조로 조영되는 것으로써 일반적으로 대왕의 석비나 묘비와 그 형태는 동일하나 불교의 유물인 까닭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탑비에는 고승의 일평생 행적이 건립 년월일과 함께 새겨 지고 있어, 그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탑비는 맨 밑에 구부(龜趺)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지며, 상부에는 용 머리가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 장식되어 진다. 


천은사 부도전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향우)으로 약간 언덕인 산비탈에 석비(石碑) 2기와 함께 10여기 부도가 집중돼 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속한 것들이다. 부도가 조사를 숭배하고 이를 기리는 문손들의 공경심에서 우러나온 작업이라면 통일 신라시대 이후 계속해 이어졌을 법도 한데 고려중기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제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범란당 부도

범란당 부도는 연화문을 엷게 조식한 원형의 대좌에 상후하박인 고복형의 탑신을 얹어놓았다. 옥개석은 방형으로 상면에는 전후좌우 사방에 세줄의 기왓골형을 조각했고 그 위에 보주를 표출했다. 탑신 전면에는 '범난당영재탑(梵鸞堂英宰塔)'(자경 7cm)이라 음각명문했고 뒷면에는 '불기이구오육년경향법려입(佛紀二九五六年京鄕法侶立)'(자경 3.7cm)이라 썼다. 위 명문에 의하면 이 부도는 1929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총고 128cm, 대좌직경 48cm)


#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건물로 산사에 들어서면 맨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이 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다고 해 일주문이라 하는데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적인 번민과 욕망을 벗어버리게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로서 건축적으로는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만을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 일심(一心)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뤄지고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일주문의 지붕은 대개가 다포계의 맞배 지붕을 하고 있으며 보통 소속산문과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걸어 사찰의 소속과 격을 알린다.



국립공원 천은사 매표소가 있는 산문을 지나 300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천은사의 넓은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끝에 천은사 일주문이 있다. 천은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천은사 일주문은 그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절경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현판(90x114)은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가 마치 물 흐르듯 수기를 불어놓은 수체(水體) 글씨로 썼다.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서부터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았다는 신기한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일주문 아래에서 가만히 귀기울이면 현판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일주문 옆으로는 낮은 담장을 둘러 공간감을 절묘하게 살리고 있다.


# 수홍루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보통 피안교라 부르고 있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이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불자들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는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겠다 . 천은사에는 그 다리 위에 2층 누각인 수홍루가 있다. 수홍루는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다. 정면 현판의 글씨는 염제(念齊) 선생의 글씨이다.


# 천왕문



수홍루를 지나면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그 끝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며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천왕문은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불가의 세계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의 궁궐을 형상화해 세워졌다. 천왕문 앞에는 사찰에 따라 금강문을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사천왕은 33천중 요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으로 호세천이라 하며, 수미산 중턱 4층급을 주처로 하는 신이다. 불가(佛家)에서 사천왕천은 욕계6천의 첫 번째 문이자 수미산 세계이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 이르면 좌우에 해와 달의 세계가 빛나고 그 위로는 수미산 정상부 도리 33천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천왕은 이러한 수미산의 4주에 위치하면서 각각이 세계르르 수호하고 있다.


천은사 사천왕




지국천왕은 건달바와 부단나 등의 신을 거느리고 동쪽 하늘을 수호하고, 광목천왕은 용과 비바사라는 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수호하며, 증장천왕은 구반다와 폐려다라 불리우는 신을 거느리고 남쪽하늘을 수호하며, 다문천왕은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계절적으로는 봄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광목천왕은 손에 용과 여의주 또는 견색을 들고서 인간의 노여움의 감정을 다스리고 여름을 주관하고 있다고 한다. 증장천왕은 손에 칼을 들고서 사랑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다문천왕은 손에 보탑이나 깃대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 극락보전


보제루 맞은 편에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신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천은사는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다. 극락보전은1774년 혜암선사가 중수하면서 세운 전각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적 다포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019년 5월 23일 국가 지정 문화재 보물 제2024호로 지정됐다. 높직한 방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불단에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상이 있고 그 뒤에 보물 제924호인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돼 있다. 그 밖의 불화로는 삼장탱화, 신중탱화 및 후불벽화로서 수월관음도가 있는데, 삼장탱화는 1776(영조52)에, 신중탱화는 1833년(순조33)에 봉안된 것이다. 현판 및 상량문으로서는 1886년(고종23)의 〈개금불사동참대시주〉와 근래의 '법당상량문'이 있고, 그 밖에 동종과 괘불함도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이 있다.


극락보전은 앞면3칸, 옆면3칸의 팔작지붕이고 민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를 구성했는데 포작은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상부에는 계두와 연봉이 붙어 있고 중앙칸 기둥 위로는 봉두장식이 있는 등 전반적으로 화려하다.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2구씩 배치했다. 가구는 5양구조로서 종량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창호는 정면 3간 모두 3분합문으로 중앙칸은 소슬빗꽃살, 양 협간은 정자살과 빗살(중앙부)양식으로 돼 있다.


극락보전의 부처님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 일찍이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그 유명한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을 불러도 극락에 왕생시켜 괴로움을 물리치고 불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신앙은 예로부터 사후신앙과 관련해 서민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전국의 사찰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거나 미타정인(九品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인을 하고 계신다.


# 극락보전의 후불탱화



극락보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설법인이나 미타정인을 취한 아미타부처님이고 좌우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된다. 그런데 아미타불탱화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의 주존상과 협시보살만 다를 뿐 대웅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통례이다. 왜냐하면 아미타신앙은 '정토 3부경'에 의한 신앙인데, 이 경전들을 설하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고 듣는 이가 '법화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 정면으로 2층으로 지어진 누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보제루의 모습이 보인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法要式) 집회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후면만 중이층으로 구성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다. 현판은 1934년 호남명필 이삼만(李三晩)이 썼다. 이 현판 글씨는 단아한 보제루와 잘 어울리고 있다. 보제루의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원통형(일부는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이며, 공포는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한 2익공식이다. 공포 역시 연봉조각이 올려져 있는 등 화려하다.


# 운고루




보제루 오른쪽으로 도량의 중정(中庭-한 가운데 정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오른쪽 축대 위에 운고루(雲鼓樓)가 있다. 보통 루(樓)형식으로 예불시에 치는 사물이 걸려 있고 흔히 범종루(梵鐘樓) 또는 종고루라고도 한다. 이 종각에는 예불이나 행사시에 치는 사물(법고.운판.목어.범종)이 있는데 조석 예불시에 연주해 그 소리를 통해서 세상에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 설선당


종고루 바로 다음 건물은 설선당이다. 'ㄷ'자 형태로 구성돼 있는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금은 주지실과 종무소 그리고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다. 이 건물은 주 출입구를 중정쪽에 두지 않고 그 반대편에 두어 본전공간의 성스러움을 배려했고 또 개개 건물의 기능성도 최대로 살렸다. 구조는 막돌초석형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양식이고 부분적으로 편리하게 툇마루를 설치했다. 맞은 편에 있는 회승당과 함께 퇴색된 기둥 나무색과 아름다운 기와의 곡선으로 중정을 아늑하게 해 주어 찾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있다.


# 회승당



회승당(會僧堂)은 맞배지붕에 ‘ㄷ’자 모양의 건물로서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전면 마루 끝에는 범종이 있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778년(정조2)에 봉안된것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은 부조(浮彫)로 된 부분과 점각(點刻)으로 된 부분이 있고 1778년에 해당되는 건륭 연호는 부조로 돼 있고 점각 부분에도 1880년(고종17)에 해당되는 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에 약간의 보수가 있었던 듯하다. 명문으로는 그 밖에도 ‘풍진명(豊鎭溟)’ 및 ‘남원천은부원중종(南原泉隱府院中鐘)’등의 글이 있다. 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그만 총알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25 때 이곳 지리산의 형편이 어떠했는 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 삼성전



삼성전은 관음전 우측(향좌)에 위치하고 있다.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현재 ‘삼성전’과 함께 ‘칠성전’, ‘산왕각’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안에는 치성광여래상과 독성상, 산신상, 동자상 2체가 봉안됐고, 불화로는 최근에 그려진 칠성탱화 및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 관음전



극락보전 뒤로 계단을 올라가면 여러 전각 중 가운데 있는 전각이 관음전이다.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보살 가운데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관음전인데,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고 그 뒤에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 후불탱화를 봉안한다.


# 팔상전



관음전 바로 옆에 있는 팔상전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774년 무렵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알려져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고 그 밖에 근래에 봉안된 영산후불탱화 및 팔상도 4폭이 있다. 팔상전은 최근에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막돌로 석축겸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포작을 올렸고 공포형식은 내, 외 2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쇠서 단부를 날카롭게 처리했다. 주간포(柱間包)는 각 간 모두에 1구씩 배치했다. 가구는 양측면으로부터 충량을 걸은 5양형식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인 여덟장면을 탱화나 존상으로 모신 곳인데, 팔상 탱화를 봉안하고 달리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좌협시에 미륵보살, 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해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본래 정광불로서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석가모니부처님이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부처님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있는 이른바 시간삼세불인 것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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