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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89] 전법도량이자 불교계를 대표하는 천년지장도량 ‘용문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2-18 13:11:45
  • 수정 2024-04-02 0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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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경남 남해 호구산에 자리 잡은 용문사는 신라 문무왕 3년(서기663)에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건립한 보광사(일명 봉암사)를 그 전신으로 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그 곳에 첨성각을 건립하고 선교의 문을 열어 그 명성을 떨쳤으나 이후 보광사의 사운(寺運)이 기울자 조선 현종 원년(1660)에 백월대사는 용소리 호구산에 터를 정하고 사찰을 옮기게 됐다.


이후 신운화상이 첨성각 근처에 탐진당을 세우고 상법화상이 적묵당을 건립하는 등 중창을 거듭해 오다 현종 7년(1666)에 백월대사가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했다.


이어 숙종 35년(1709)에는 염불암이 중창됐고 절의 맞은편에는 백련암 영조27년(1751)이 건립됐다.


조선 숙종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돼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번 그리고 수국사금패 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해냈고 그때 사용했던 삼혈포와 목조 구사통이 지금까지 보관돼있다.


지금의 사찰은 본사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이 서기 1900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소장 문화재로는 보물 1446호 괘불탱화와 보물 1849 대웅전 유형문화재 7전 지방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7점을 보관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1996년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 운영되고 있는 용문사는 전법도량이자 불교계를 대표하는 천년지장도량으로 지금도 성불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 도량이다.


# 봉서루



용문사는 802년(신라 애장왕3)에 원효에 의해 창건된 사찰(보광사)이나 임난에 소실됐다. 1661년에 학진스님이 인근에 있는 보광사 건물을 옮겨와 용연 위쪽에 터를 잡았다 해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이고 중창했다.  임난 이후 호국도량으로 알려져 숙종때(1674~1720) 왕실의 축원당을 세웠고, 이후 네 번의 중수가 있었다. 봉서루에는 ‘佛丘山鳳捿樓並序’(1720년)와 ‘靈山殿天王閣鳳捿樓重修記’(1833)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초창은 1720년에, 현재의 모습을 보이는 구성의 중창은 1833년에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용문사의 입구에서 일주문과 천왕교를 건너 천왕각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사찰 영내로 진입하는 주축상에 놓인 건물이 봉서루이다. 일주문에서 천왕각의 진입방향은 동남향의 축이며, 봉서루 이후의 사찰배치는 남향의 축으로 놓여있어 진입축과 배치축의 전환이 이뤄지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 건물이다. 



봉서루는 정면 7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중층건물로서 누하진입형식의 공간구성을 하고 있고, 높은 단차를 해결키 위해 하층의 기둥을 높게 처리했다. 이 하층의 기둥은 근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주로 바꿔 원래의 형상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층 서측 후면의 석주 2기는 재래의 것으로 판단되는 석재로 3단으로 된 더럼형상의 기둥을 수직으로 쌓아 구성한 특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층의 공간은 전면은 비어 있고, 후면에서는 중앙의 통로를 제외한 공간에 창고공간을 마련해 벽을 막았다. 상층의 바닥은 맞보형의 우물마루로 구성돼 있는 넓은 강당으로 구성돼 있다. 벽의 구성은 전면과 측면이 바라지 문으로 구성돼 있고, 대웅전을 향한 후면은 개방됐던 것으로 파악되나, 근년에 교살창의 삼분합문을 달았다. 누의 중앙에는 1열의 기둥열을 두었다.지붕가구는 무고주 7량의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큰 구성을 이뤘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네 모서리에는 선자연이 잘 구성돼 있다. 공포는 조선 후기의 초익공 형식이다. 내진주에는 교두형의 첨자에 주두를 뒀고, 종도리의 대공은 판대공으로 구성했다. 보의 단청은 적지 않게 변색이 됐지만 원형을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을 정도이며, 연등천정을 새로 칠했다.


# 대웅전



봉서루를 들어서서 마주하게 되는 대웅전은 숙종 29년(1703년)에 성화 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전각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의 덧서까래가 길어저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 보이고, 네 귀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가 있다. 



건물 처마 아래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머리가 장식돼 있고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뒤로 걸린영산회상탱화는 건양(建陽) 2년(189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림 중앙에 있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전방 좌.우측에 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배치돼 있다. 그 상단에는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각각 배치돼 있고, 가장 상단에는 제자상, 금강상, 사천왕상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 남해용문사목조지장시왕상


두부가 민머리인 지장보살상은 상반신을 곧게 세워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양감있고 건장한 모습이다. 신체적 특징은 무릎이 높고 像底前後徑이 넓으므로 불신의 안정감을 더해준다. 상호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살집이 있고 턱 부위를 모나지 않게 표현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마가 아주 넓은 편이고 눈썹사이에는 백호가 돌출돼 있다. 



눈은 옆으로 길고 눈꺼풀이 두꺼운 편이다. 코는 콧날을 완만하게 하고 콧방울을 작게 나타냈고, 인중은 뚜렷하고 넓게 패여있다. 도톰한 입술은 입술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띤 모습이고, 귀는 크고 두꺼우며, 귓바퀴가 뚜렷하다. 목은 짧은 편으로 3조의 융기선을 평행하게 처리해 삼도를 표현했다. 양손은 제1지와 3지를 맞대고 양 허벅지 위에 각각 두었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양손의 손톱은 비교적 크며 손마디 조각도 뚜렷하게 처리했다.착의법은 상체에는 가슴 아래로 평행하게 보이는 승각기를 먼저 입고,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대의를 입었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진 대의는 목덜미에서 한번 접어서 양쪽 어깨를 덮고 흘러내렸으나, 오른쪽은 어깨부분만 감싼 변형통견식 착의이다. 대의는 양쪽어깨에서 3조의 주름선을 계단식으로 정연하게 표현했다. 군의는 결가부좌한 양다리 아래로 넓게 드리워져있는데, 가장자리의 조각면이 매우 두껍다. 법의처리는 매우 두껍고 옷주름을 굵고 간략한 몇 조의 선으로 표현했다.좌협시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우협시 무독귀왕은 합장은 한 채 각각 시립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고 어깨가 넓어 당당해보이고 온화한 인상이다. 얼굴은 방형이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자세이고, 표현기법은 거의 동일하다. 


사진출처-문화재청 두부에는 무독귀왕상과 같은 원류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홀(제5.6.7.8.9.10상)을 쥔 경우, 책과 붓(제1.2상)을 들고 있거나 손을 무릎 위에 걸친(제3상) 다양한 모습이다. 얼굴의 세부표현은 도명과 무독상과 거의 같은데,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에서 백색 치아를 드러내어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은 매우 해학적이다. 착의법은 역시 상체에는 紅袍를 입었고, 하체에는 청색 혹은 홍색군의 위에 녹청.백록.청색 등의 요포를 걸쳤고, 가슴부분에는 군의를 묶은 백색의 띠매듭이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가슴 중앙에서 부터 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화문을 도드라지게 장식했는데 이는 따로 제작해 끼워넣은 것이다.의자는 각각 조립해 구성했고, 족좌를 따로 부착했다. 등받이 양측에는 용두장식이 있고, 팔걸이의 양측에는 鳳凰頭를 장식하고 있다.


# 남해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이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 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돼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됐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다. 그중 경전.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돼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천왕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용문사는 조선 중기에 탐진당과 적묵당을 지었는데, 이곳 자리가 좋다해 금산의 보광사 대웅전 등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절의 이름도 용문사라 했다. 절의 입구에 있는 천왕각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데, 다른 절의 경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은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밟고 있다.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비파, 칼, 용, 창 등을 들고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문지기 구실을 한다.


# 사천왕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용문사는 조선 중기에 탐진당과 적묵당을 지었는데, 이곳 자리가 좋다해 금산의 보광사 대웅전 등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절의 이름도 용문사라 했다.절의 입구에 있는 천왕각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안쪽에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데, 다른 절의 경우 마귀를 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은 부정한 양반이나 관리를 밟고 있다.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비파, 칼, 용, 창 등을 들고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문지기 구실을 한다.


# 목조천왕좌상


남해용문사목조사천왕상(광목천왕)/사진출처-문화재청용문사 천왕문 내 좌우측에 목조천왕좌상이 각각 2구씩 배치돼 있다. 향우측에 東方 指國天王, 南方 增長天王, 향좌측에 西方 廣目天王, 北方 多聞天王이 위치하고, 4구 모두 발을 아래로 내린 기형으로 발밑에는 잡귀 1구씩 각각 밟고 있다.두부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착용했는데, 양쪽 어깨에서 발 아래까지 천의자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손의 지물로 동방은 琵琶, 서방은 龍과 如意珠, 남방은 長刀, 북방은 寶叉를 쥐고 있다.사천왕상의 제작방법은 분할제작 기법으로 각 이음부분에 나무심을 끼워 처리했고, 때로는 철심으로 고정했다.상호는 방형이고 모두 분홍색이나, 다문천왕상은 적색을 띤 연한 검푸른빛의 육신색을 발라 구별하고 있다.


남해용문사목조사천왕상(지국천왕)/사진출처-문화재청 보관은 일부 장식들이 탈락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 증장천왕을 제외한 나머지 천왕들의 경우 무궁화를 장식하고 두마리의 봉황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돼 있고 그 주변으로 각종 꽃으로 장식했다. 증장천왕의 경우 보관 중앙에 날개를 크게 편 봉황 한 마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꽃과 화염문을 장식했다.착의는 肩甲 胸甲 腹甲 腰甲을 입었고, 머리 뒤쪽에서부터 발끝까지 대의가 늘어뜨려져 있는데 두부에 위치한 천의에는 대형 화염문이 장식돼 있고 하반신 아래 부분에는 8자로 매듭지어 있다. 증장천왕과 다문천왕의 대의는 결실된 상태이다.사천왕상 발 아래의 생령좌는 따로 만들어 배치했는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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